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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자신이 행위하는대로 삶이 이루어집니다

등록 2021-06-02 09:07수정 2022-06-26 21:23

화엄경 보현보살 10대 서원

- ‘허물이 있는 부처’의 ‘본래 붓다’로 살아가기 -

실상사 무량수전 앞을 걷는 법인 스님과 반려견 다동이. 사진 실상사 제공
실상사 무량수전 앞을 걷는 법인 스님과 반려견 다동이. 사진 실상사 제공

<허물의 정체는 도둑과 손님이다. 도둑과 손님은 본디 내 집에 없다. 내가 초청하거나 방심할 때 내 집에 들어온다. 도둑과 손님은 내가 나가라고 하면 결국은 나가야 하는 약자들이다.>

내 여행의 시간은 길고, 또 그 길은 멉니다.

나는 태양의 첫 햇살을 수레로 타고 출발해, 수많은 별과 행성들에 자취를 남기며 광막한 세계로 항해를 계속하였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 길을 돌아가야 하며, 가장 단순한 곡조에 이르기 위해 가장 복잡한 시련을 거쳐야만 합니다.

여행자는 자신의 집에 이르기 위해 모든 낯선 문마다 두드려야 하고, 마침내 가장 깊은 성소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바깥세상을 헤매 다녀야 합니다.

눈을 감고 ‘여기 당신이 계십니다!’ 하고 말하기까지 내 눈은 멀고도 오래 헤매었습니다.

‘아, 당신은 어디에?’ 하는 물음과 외침이 녹아 천 개의 눈물의 강이 되고, ‘내 안에 있다! 라는 확신이 물결처럼 세상에 넘칠 때까지.

- <기탄잘리> 12,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류시화 옮김

팔만사천 법문을 종합하면 그 사유의 본질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입니다. “자신이 행위하는 대로 그 삶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만든 것은 자신이 받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입니다. “현실에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그리고 그 내용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보현행원,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법이다.

인드라망의 모든 존재들을 공경하고, 공양하고, 인드라망의 모든 존재들과 기쁨을 나눈다.

-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도법 스님

그때에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수승하신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여러 보살과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여! 여래의 말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문을 이루려면, 마땅히 열 가지 넓고 큰 행원을 닦아야 하느니라.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요, (예경제불원)- 섬기는 삶이 기본이다.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요, (칭찬여래원) -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이요, (광수공양원) - 받았으면 내놓는 게 법이다.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요, (참제업장원) - 각오와 실천이 없으면 참회는 말짱 꽝!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요, (수희공덕원)- 잘 보면 기뻐할 일 투성이다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청전법륜원) - 향기로운 말은 들어도 좋고 해도 좋다.

일곱째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청불주세원) - 사이 좋게 지내야 안 떠나지.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르고 배우는 것이요, (상수불학원) - 죽을힘으로 공부하면 행복이 온다.

아홉째는 항상 중생을 따르고 받드는 것이요, (항순중생원) - 감사합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열째는 지은 바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이니라. (보개회향원) - 내가 잘 살면 모두 즐겁다.

-<보현행원품> 이끄는 말- *각 서원의 덧붙임은 도법 스님의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에서 발췌.

실상사 대중들의 아침 예불. 사진 조현 기자
실상사 대중들의 아침 예불. 사진 조현 기자

1. 법납이 오랜 된 스님들이 수행 후반기에 조석으로 독송하는 경전이 있습니다. 행자들이 처음 공부하는 <초발심자경문>을 조석으로 독송합니다. 또 어떤 스님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독송합니다. 이 두 경문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불교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전을 섭렵하고 참선 정진을 한 스님들이 왜 그런 경전을 그리 간절하고 지극하게 반복적으로 독송할까요? 저도 <보현행원품>의 십대서원을 읽을 때마다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솟구칩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화엄경이 매우 심오하다고 들었는데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이런 말이 왜 그리 진리의 골수라고 하는지 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심오한 뜻은 반드시 난해해야 할까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는 해독이 힘들고 논리가 복잡해야 할까요?

2.생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정직한 질문(發心)을 던지고 온갖 것과 마주하며 탐구한 끝에 얻어지는 문장은 단순하고 간명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살고 있지 않다.” “사람을 망치는 핵심은 탐진치 삼독이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만 잘 해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문장은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지만 뜻은 매우 깊습니다. 진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타고의 시가 떠오릅니다.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 길을 돌아가야 하며, 가장 단순한 곡조에 이르기 위해 가장 복잡한 시련을 거쳐야만 합니다.”

3. 보현보살의 십대서원은 ‘가장 단순한 곡조’입니다. 보현보살의 십대서원은 ‘당신’을 사랑하는 노래입니다. 불러도 불러도 가슴을 울리는 대중가요의 가사는 어렵지 않지만 깊고 간절합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 유식무경, 여래장, 공성, 법계연기 등의 말씀은 결국 세계가 인드라망임을, 우리가 ‘본래 붓다’임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본래 붓다’는 팔정도와 보현보살의 십대서원을 일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곡조는 이렇습니다.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4. 보현보살의 십대서원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전제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서원이 ‘뻔한 소리’나 ‘그저 좋은 말씀’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전제해야 할까요?

5.첫째, 이 서원은 우리 삶의 자유와 행복을 일상에서 누리기 위해 실천해야 한다는 지향점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중생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향한 소박한 신앙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십대서원은 어느 특정인을 바라보며 올리는 서원이 아니라 나와 우리를 향한 서원이고 실천입니다. 이 서원은 생명평화의 즉시적, 즉각적 실현입니다.

둘째, 이 서원을 구현하는 장소는 인드라망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 나와 우리’라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화엄경 탐구자들은 이 세상을 세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 세계(지정각세간),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세계(중생세간), 그리고 부처와 중생이 발 딛고 사는 삶터(기세간)입니다. 이를 삼종세간(三種世間)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개의 세계가 서로 다르지 않고 상즉하고 상입하는 관계를 융삼세간이라고 하여 공동체로 보았습니다. 여기 화엄경 탐구자들은 부처와 중생과 공간을 불신(佛身)으로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중생과 국토을 불신으로 본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입니다. 중생과 우리의 공동체 삶터와 온갖 업보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불신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허물이 있는 부처’와 ‘본래 부처’가 다르지 않고, 그대로 불신이라고 보았습니다. 부처의 세계가 단지 석가모니 부처님, 법당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공동체에서 무수히 많은 불신을 보아야 합니다. 농장신, 공방신, 공양간신 등입니다. 그래서 천불 만불의 명호가 생겼습니다. 일과 사람 속에서 부처의 세계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실상사 농장에서 공동 울력을 하는 실상사 사부대중. 사진 실상사 제공
실상사 농장에서 공동 울력을 하는 실상사 사부대중. 사진 실상사 제공

<유마경>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보살의 국토가 어디에 있는가? 중생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보시가 불국토이고 인욕이 불국토이다.” 수행은 먼 훗날, 어떤 곳에서의 소득을 바라는 바람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우리 함께 공경하고, 공양하고, 인욕하고, 성찰하고, 공부하고, 나누고, 찬탄하고 격려하는 일상의 삶이 수행이고 그곳이 인드라망화엄불국토입니다. 행위가 곧 행위자입니다. 인(因)이 과(果)와 다르지 않으며 나아가 인과동시입니다.

셋째, 중도실상의 관점에서 이 서원을 구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중도실상이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점에서 중도실상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이 중도실상입니다(如實知見). 또 하나는 이 세상의 모습이 중도실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중도실상의 삶을 구현해야 한다(如實知見行)는 것입니다.

6.중도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론>의 ‘관사제품’을 다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연(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는 말한다. 공(空)이라고, 또한 가명(假名-임시적으로 부여한 명칭)이라고, 이렇게 보는 것이 중도라고.”

7.하나의 존재와 사건은 본래부터 그 모습으로 있었던/있는 존재가 아니라 온갖 조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면화되고, 사회화되고, 문화로 자리 잡은 어떤 존재나 사건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고, 있고, 있을 것이고,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방향을 잘 못 잡고 오류가 일어납니다. 잘못 생각하고, 편파적이고, 집착하고, 대립하고, 배제합니다. 붓다는 이런 모습들이 인연(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본래 있지 않음’이라고 통찰하라고 합니다(空).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어떤 의도로 어우러진(인연) 모습들은 고정, 불변, 영원한 모습이 아닌, 임시적인 모습이라고 통찰하라고 합니다(假名).

8.이렇게 어떤 하나의 존재와 사건을 ‘본래 있지 않음’과 ‘임시적으로 있음’을 동시적으로 통찰하여 보는 삶을 ‘중도적 삶’이라고 합니다. 요약하자면 ‘중도실상’은 ‘공과 연기의 동시적 조망’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화가 많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화가 많은 사람’이 본래 있지 않았고(空,) 노력(수행)하면 ‘화가 많은 사람’이라는 임시적인 명칭은 소멸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는 이치(緣起)가 중도실상이고, 중도적 삶입니다.

9.그러므로 공과 연기의 상호 관계의 중도실상은, 본래 붓다의 모습인 청정태(緣起卽空)이고, ‘허물이 있는 붓다’가 ‘본래 붓다’를 회복하는 가능태(空卽緣起)입니다. 또한 중도실상은 다양한 것들의 다양한 연결선이기 때문에 복잡계이며(십현연기), 복잡계는 저마다 빛나는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화엄공동체입니다. 보현보살의 십대서원은 화엄공동체의 본래 모습이고, 지향해야 할 세계입니다.

10.이제 열 가지 서원을 대략 살펴보겠습니다. 인드라망 존재들이 인드라망 존재들에게 드리는 공경, 찬탄, 공양, 참회성찰, 칭찬격려, 배움, 이웃과 함께 나눔 등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문장과 발성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일상에서 좋은 삶이 되어야 좋은 말이 될 것입니다. 말로 득세하고 말로 이기려는 세상에 좋은 삶이 곧 좋은 말이 됨을 새겨야 할 때입니다.

실상사작은학교. 사진 실상사 제공
실상사작은학교. 사진 실상사 제공

11.위에서 말한 세가지 조건, 즉 인드라망 존재들이, 인드라망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곳 일상에서, 중도실상의 통찰을 통하여, 생명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바탕 아래 열 가지 서원을 새기고 실현해야 합니다. (* 화엄에서 ‘십’은 한정된 십이 아닙니다. 원만수라고 합니다. 어떤 바람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명평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덕목은 다양하게 시설될 수 있습니다.)

12.여기서 다시 전에 거론한 ‘언어의 연결’을 상기합니다. 하나의 언어, 즉 하나의 서원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서원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그 속성이 서로 맞물리고(相卽) 서로 역할을 주고받습니다(相入). 자세하게 천착해 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들을 공경합니다(禮敬諸佛願)’가 있습니다. 내가 이를 원만하게 실현하고자 한다면 내 이웃을 칭찬격려 하고(칭찬여래원), 내 이웃과 좋은 일을 나누고(수희공덕원), 배움을 통하여 나를 변화 시키고 성장해야 하고(참제업장원, 상수불학원), 내 일상의 행위가 곧 내 이웃에게 행복을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는 노력이 있을 때(보개회향원) 진정으로 공경의 서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예경제불) 속에 여럿(아홉 개의 서원)이 있고(동시구족,일즉일체), 하나(예경제불)이 ‘主’(주)가 되고 나머지 아홉이 ‘伴’(반)이 되는 주반무애가 이루어집니다.

13.이 세계의 참 모습은 인드라망입니다. 인드라망은 복잡계입니다(잡화엄식, 雜華嚴飾). 복잡계는 상호 소통을 통한 노력입니다. 저는 십대서원에서 예경제불원, 참제업장원, 상수불학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삼존불과 같은 배치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인드라망 존재들을 지극히 섬기는 마음이 본존불이 되고, 늘 마음 챙기고 성찰하는 삶과 늘 인드라망 존재들에게 배우는 삶이 좌우의 보살들이 되겠습니다.

14.보현보살 십대서원에서는, 모든 인드라망 존재들을 부처로 모시고 섬기며, 아울러 일상의 세세하고 구체적인 일에서 배우고, 나를 향상 시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칫 법당에서, 부처님에게서만, 사유에서, 책과 학습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처처불상(處處佛象) 사사불공(事事佛供)의 의미를 새겨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일과 수행이 다르지 않고, 일이 곧 수행임을 알게 됩니다.

15.이 서원들이 글과 말로는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그러나 삶은 일상이고 구체적입니다. 현장에서는 그리 마음 먹은대로 쉽게 실현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하는 부처’를 만나기도 합니다. ‘역순자재(逆順自在)라고 화엄학 논서에 그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것들(逆)과 나에게 좋은 것들(順 )이 서로 소통하라는 수행입니다. 인간은 좋을 때는 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만은 없다는 사실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짜 공부는 역경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침착하고, 참을성 있게, 편견을 버리고 공경하고, 찬탄하고, 성찰하고, 배우고, 회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서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피로와 마주할 것이고 의미가 시들해지는 상황과 마주합니다. 그래서 이를 염두에 두고 서원의 말미에 이런 다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하려니와, 중생계 내지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함이 없어 순간순간 이어져 끊임이 없고,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라.”

글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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