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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꽃은 갑자기 피는 것이 아닙니다

등록 2021-06-16 08:59수정 2021-06-16 09:15

꽃은 갑자기 피는 것이 아니지

봄이 와서 피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살아서 피는 거지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짝사랑까지는 아니지만 혼자서 어떤 여자 아이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재수생이었고 그 아이는 대학 1년생이었다. 피아노 치는 사람이 필요해서 동무한테 말했더니 자기 학교에 피아노 잘 치는 아이가 있다면서 소개해 주었다. 함께 연습을 하면서 정이 들기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자꾸만 그 아이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 말라고 했거늘 몰래 쳐다본 죄로 마음속에 불씨가 하나 생기고 말았다. 불씨는 날마다 나를 꼬드겨 불꽃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씨가 불꽃이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날은 남몰래 잠자는 불씨를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내 마음속에 흩어져 있는 낙엽을 긁어모아 불을 붙여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불은 타오르지 않고 연기만 가득했다. 그놈의 연기는 피하려고 하면 피하는 방향으로 나를 쫓아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다시는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 말라고 꾸짖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눈물 흘릴 일이 생길 테니 미리 연습하라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도 나는 날마다 불장난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연기 속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굴뚝이 막힌 건지 아니면 불을 지피는 법을 모르는 건지 나는 본의 아니게 어줍은 화부가 되어 날마다 조금씩 눈물을 흘리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문학지에서 주최하는 전국 대학생 수필 공모전이 있었는데 불현듯 그 공모전에 응모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이 아니었던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응모를 했는데 당선이 되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고 떨어지면 그냥 잊기로 스스로 다짐을 했다. 물론 그녀는 이런 나의 꿍꿍이를 전혀 알지 못했고 나는 그저 그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가능성도 없으면서 억지를 부리는 내 모습이 참 가엾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정말 10명 안에 뽑힌 것이다.

아, 큰일 났다! 이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한담?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도무지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상금 받은 걸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뭐가 미안하냐고 묻기에 허락 없이 이름을 훔쳐서 수필 공모전에 응모했다고 나의 꿍꿍이를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그녀는 이 상금으로 술이나 먹자며 껄껄 웃었다. 그녀와 함께 술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았고 갑자기 세상이 평화롭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 골목 전봇대 밑에서 나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술을 마신 건 알겠는데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와 단둘이 있었다는 사실이 행복할 뿐이었다. 적어도 짝사랑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나의 짝사랑은 사랑을 넘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의 불씨는 여전히 타오를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가 남자 동무를 데리고 연습실에 왔다. 같은 과 동무라며 소개해 주었는데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예 내 예상이 들어맞았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그 남자 동무와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마치 내 사랑이 납치를 당한 것 같았다. 보통 납치를 당하면 도와달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떠났다. 처음으로 그녀가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미워하면 할수록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꺼질 듯 말 듯 가냘픈 불씨가 아무래도 꺼져버릴 것 같았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그 흔한 얘기로 나는 사회 구성원도 아니었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재수생이었고 그렇다고 우리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었다. 슬픈 연극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사랑의 이름으로 그 불씨를 살려 보려고 애를 썼다. 나는 내 마음속에 뒹굴고 있는 낙엽들을 긁어모아 불씨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후후 불었다. 후후 부는데 눈물이 나왔다. 연기 때문에 나오는 건지 슬퍼서 나오는 건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간절함이 통했던가? 드디어 불이 붙었다. 이상하게도 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타올랐다. 불길을 다스린 적이 없던 나는 당황하여 허둥대기만 하였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놈의 불길은 태우라는 사랑은 태우지 않고 조용히 잠자고 있는 내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불길을 피하려고 했으나 나는 꽉 막힌 마음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다행히 눈물이 불길을 잡아 주었지만 화상을 입은 내 마음은 날마다 쓰리고 아팠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고 난 뒤 나는 날마다 술을 퍼마셨다. 마치 어느 슬픈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예상대로 내 마음의 평화는 저물었고 나의 세상은 어둠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현실에서 나타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했고 어떤 사람들은 민주의 봄을 기다렸다. 그때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사랑의 불씨가 꺼져버려 모든 감각이 둔해진 탓이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그 틈에 민주는 군인들에게 납치되어 나라는 다시 군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민주 투사들이 희망의 불씨를 태웠지만 불은 좀처럼 지펴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병정놀이였고 기어이 시비시비(12.12)사태가 일어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약방에 갇혀 지내던 나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지 못했고 그해 겨울 동무들이 찾아와 들려준 얘기를 듣고 비로소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도대체 그런 불씨는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라에 이런 흉터를 남긴 것일까? 가엾은 내 나라, 민주의 봄이 오는 줄 알았더니만…

나는 민주 투사도 아니면서 겨울나라에 갇힌 민주를 생각하며 기타를 잡았다. 미국으로 떠나간 그녀의 얼굴이 겨울나라에 갇힌 민주와 오버랩 되었다. 천한 눈물은 있어도 천한 사랑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사랑이라는 것도 사람을 잘못 만나면 천해질 수 있구나. 남들은 그녀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의 못생긴 얼굴이 예쁘기만 했지. 어려운 코드도 필요 없었다. 화려한 반주도 필요 없었다. 그냥 기타줄 튕기며 나는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눈물이 흘러 겨우겨우 붙어있는 불씨의 숨결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민주여! 사람들이 너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너를 향한 백성들의 불씨는 가물거린 지 오래, 나 역시 이제 너를 좋아할 힘도 없고 싫어할 힘도 없고 그냥 관심 자체가 없어졌다. 지난날의 내 사랑은 못생겨도 예뻤지만 너는 거울도 보지 않으니 이제는 보기가 싫구나. 하지만 너를 등에 업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민주가 잘생겼다고 하지. 그들은 너의 이름을 팔아 권력을 누렸지만 백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너의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너를 등에 업은 사람 가운데 너를 아는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해 보아라.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없다, 이게 맞는 말이지.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어떤 사람은 앙상한 가지를 보고도 행복하다 말하지. 왜냐하면 봄에 새잎이 돋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눈앞의 앙상한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면서 꽃 피어날 봄날을 기다리지. 봄은 앙상한 나무에서 오는 건데 꽃이 피고 나서야 봄이 온 것을 알게 되니 그 옛날의 민주 투사들조차도 앙상했던 민주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불씨가 있다. 문제는 그걸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물건이 어느 날 서랍 속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불씨가 불현듯 발견되는 경우도 있으니 이 나라에도 그런 불씨가 발견 됐으면 좋겠고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사랑이 남아있다면 다시 한 번 그 불씨를 살려봤으면 좋겠다. 꽃은 갑자기 피는 것이 아니지. 봄이 와서 피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살아서 피는 거지.

그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이젠 사랑의 불꽃 태울 수 없네

슬픈 내 사랑 바람에 흩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사라져버렸네

텅 빈 내 가슴에 재만 남았네

불씨야, 불씨야 다시 피어라

끝내 불씨는 꺼져, 꺼져 버렸네

이젠 사랑의 불꽃 태울 수 없네

-<불씨>, 1982/처음 제목 : 민주에게

한돌/치유음악가, <홀로아리랑>,<개똥벌레>,<조율>등의 작사·작곡가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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