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선
현대 한국 불교의 최대 논쟁의 하나로 ‘돈(頓)-점(漸) 논쟁’을 꼽을 수 있다.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닦느냐는 ‘깨달음과 수행’ 논쟁이다. 돈은 돈오돈수(頓悟頓修), 점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약자다. 돈오돈수란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는 것’이다. 이를테면 단박에 도통해 일대사를 해결해 마친다는 것이다. 돈오점수도 먼저 단박에 깨닫는다는 점에선 같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도 점차 닦아나간다는 점에서 돈오돈수와 다르다.
이 논쟁은 성철 선사(1911~93)가 한국 불교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보조 지눌 국사(1158~1210)의 주장을 내치면서 일약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현대 불교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성철선사의 영향으로 현재 한국 선가(禪家)에선 돈오점수론보다는 돈오돈수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부 선승들 사이에서 돈오점수는 이단으로 취급될 정도다. 그러나 돈-점 논쟁의 역사는 간단치 않다. 이미 1500여년 전 중국 남북조시대 때부터 계속되어온 논쟁이다.
<돈오선>(클리어마인드 펴냄)은 이 논쟁의 역사부터 문제까지 다룬 책이다. 저자인 월암 스님은 ‘불립문자’(不立文字·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에 대한 교조적 해석으로 경전과 글을 폄하하기도 했던 한국 선가에선 드물게 중국 베이징대에서 ‘돈오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우리나라 선의 종가인 지리산 벽송사 선원에서 매년 10여일씩 선승들을 대상으로 한 선회(禪會)를 열어 선가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선회는 전국의 선방이 오직 좌선만 하는 것과 달리 그의 저서 <간화정로> 등을 강설하면서 이론과 실참을 병행함으로써 선(禪)에 대한 ‘바른 이해’(正見)를 바탕으로 선을 체득하도록 하는 자리다.
월암 스님은 <돈오선>의 맺음말에서 “발심이 곧 구경이라고. 한 번 뛰어 넘어 바로 여래의 언덕에 올라 비로정상을 당당하게 노니는 본색납자가 되어야 염라노자에게 밥값을 정산하게 될 것”이라면서 “선가의 안목으로 조사관을 타파하고, 선가의 수족으로 삼수갑산을 향해가자”고 당부하고 있다. 단박에 번뇌미혹의 허망함을 보아 어떤 험고에서도 열반락을 누릴 수 있는 붓다로 깨어나라는 그의 촉구는 돈오적 선승의 풍모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돈오’(즉각 깨달음)이후 ‘닦음’의 문제로 성철선사-보조의 문도들 사이에서 감정적 대립만으로 치달으면서 간과해버린 논쟁의 역사성과 현실적 맥락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치고 있다.
‘깨달음 이후에 닦아야한다’는 한마디에 욕을 당한 것은 보조만이 아니다. 육조 혜능을 당시의 최대 라이벌 신수보다 조사선의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일등공신인 혜능의 적자 신회조차 돈오점수설로 인해 지금까지 폄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돈수’론자들은 번뇌미혹의 허망함을 보면 번뇌가 즉 보리이며, 범부가 즉 부처임을 확연히 알기에 더 이상 깨닫고 얻을 것이 없다는 식이다. 반면 선의 교과서인 <능엄경>에서 말하듯 ‘마치 큰 바다의 맹풍이 단박에 쉬어지나 파도는 점차로 멈추는 것과 같으며, 마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육근이 단박에 다 갖추어졌지만 역량은 점차 구비하는 것과 같고, 햇빛이 단박에 떠오르지만 서리와 이슬은 점차 소멸되는 것과 같다’는 ‘점수’론자들의 주장이다. 이치로는 단박 깨달아 모든 번뇌가 제거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므로 모름지기 차례로 제거하거나 근기에 따라 대처하도록 이끌어준 것은 규봉종밀로로부터 위산영우, 화두선의 개창자 대혜종고, 보조지눌, 벽송지엄, 청허휴정, 경허에 이르기까지 바른 눈을 가진 조사들에 의해 한결같이 유지되어온 설이이라는 것이다.
이 책엔 돈수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들이 등장한다. 뉴욕주립대 박성배교수는 “점수설이 인간 사회 속에서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넓은 의미의 수행이론이라면, 돈수설은 이타적 보살행에 대한 관심표시나 구체적인 언급을 일체 거부하고 오직 깨침 하나만을 위해 사는 깊은 산속 수도자들의 용맹정진반 경책과도 같은 매우 좁은 의미의 특수한 수도이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철선사가 돈수를 다시 제창한 것도 수행자들이 수행 자체에 철두철미하지 못한 채 초견성 운운하며 도인 흉내를 내는데 대한 준엄한 경책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종교적 실천 없이 논쟁을 위한 논쟁에 빠지기 보다는 양론을 상호 보완해 중생의 입장에서 일상 생활의 번뇌와 생사로부터 놓여나는 돈오해탈의 실천의 길을 여는 것이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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