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의 열 가지 사귐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친구를 좋아한다고 하였소. 그런데 여기서 거주한 지 이 년이나 되도록 누구 한 사람 사귀는 것을 여태까지 보지 못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
나는 그 말에 이렇게 대답하였지요. “이는 당신이 모르는 소리요. 나의 사귐은 대단히 넓어 온 세상 사람을 죄다 통틀어도 나만큼 널리 친구를 사귀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나의 사윔에는 열 가지가 있지요. 열 가지 사귐이란 천하의 모든 사귐을 망라한 것입니다.”
“무엇이 열 가지 사귐일까요? 그 중에서 가장 친밀한 사귐은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구일 것이고, 그 다음은 시정에서의 사귐입니다. 만약 화씨(和氏)가 매우 공평한 마음으로 장사를 하고 민씨(閔氏)네 기름값이 항상 일정하다면 당신도 그 사람에게서 물건을 사고 나 또한 그 사람에게서 물건을 사게 되는데, 그런 일이 오래 지속되어 일상사가 되면 당신은 거기에 대해 의식조차 못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함께 놀러 다니는 친구이고, 그 다음은 오랫동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입니다. 함께 여행을 다니는 친구란 멀리 있으면 배를 빌려서라도 찾아가고, 가까이 있으면 함께 웃고 떠들면서 농담을 하더라도 노여워하지않고, 어떤 일을 예측함에 있어 신기하게도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지요. 그 사람이 꼭 어떠해서가 아니라 함께 있으면 즐거워 돌아갈 것을 잊어버리고 헤어지면 보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기예가 뛰어나서 좋은 사람이란 거문고 선생이나 활 잘 쏘는 무사, 바둑의 고수나 화가 같은 이들을 말합니다. 술수에 능해서 어울리는 이로는 천문·지리·역법·점복 같은 것들을 볼 줄 아는 이들을 말하지요. 그들 중에 통달한 고수야 당장은 만날 수 없더라도 그런 기예에 뛰어난 사람들은 그 기세도 으뜸이니, 결단코 어디에 속박되거나 악착스럽기만 한 옹졸한 무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잠시 그런 사람과 함께 놀아보면 심신이 모두 상쾌히지니, 책을 뒤져 옛것을 찾거나 도덕을 이야기하고 인의를 설파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지 않던가요? 글로 사귀는 친구나 혈육 같은 친구, 마음을 다 드러낼 수 있는 친구와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에 이르기까지 사귀는 바가 단 한 사람인 경우에서 만족하진 않았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고 말하는지요? 또 무엇 때문에 달랑 한 사람만을 들어 나의 사귐을 알아보려 하는 것입니까?”
친구로 사귀면서 진정으로 생사를 맡길 만한 사람은 내가 천하를 이십 년이 넘게 돌아다녔지만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속을 모두 내보이며 믿을 만한 이로는 생각건대 고정(古亭)의 주자례(周子禮,周思敬)뿐인가 합니다!
친 혈육이나 다름없이 가깝고 격의 없이 지내던 이를 들라면, 내게는 죽은 친구 이유명(李維明.李逢陽)이 거의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에는 이백이 있고 글씨에는 문징명이 있다지만, 왜 또 그렇게 꼭 높은 경지에 올라야만 하겠습니까! 그저 종이와 먹에 마음을 쏟아 문장의 동산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고, 종횡무진 재능을 발휘하여 샛길로 빠지 않을 사람이라면 또한 어울려 놀면서 같이 늙어가도 좋을 것입니다.
오직 먹고 마시는 것만이 목적인 친구라면, 있으면 찾아가고 없으면 발길을 끊고 찾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라 해도 반드시 어진 이를 사랑하고 손님을 좋아하며 가난해도 단정하고 부자라도 고결한 사람이라야 찾아갈 따름입니다. 손님을 사랑하는 것이 으뜸의 덕목이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다음이며, 단정하면서도 고결한 것은 또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술과 음식이란 일상적인 것 중에서도 제일의(가장 중요한 도리)이지요.
나는 오직 술과 음식이 필요할 뿐 요리를 잘 차려 연회를 즐기는 것은 피곤하기만 하니, 함께 먹는 사람도 음식을 매개로나 알고 기타의 일은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되어야만 손님을 좋아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어진 이를 좋아할 수 있게 되며, 단정하고 청결할 수 있게 됩니다.
용납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친구로 삼으면 안 되는 이도 없어지지요. 하물며 첫 만남부터 대화로 즐거움을 나누는 사이,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른 사이, 굳이 매개물을 쓸 필요가 없는 친구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아, 집어치우십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늘어놓음으로써 나의 교유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표시나 하겠습니다. 먹고 마시기나 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야 그를 천시하겠지만, 나는 그런 당신과 술친구로 사귀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내치지나 말아주십시오. 분서(焚書·이지 씀, 김혜경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이지(李贄, 1527~1602)=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이다. 조상 중에는 페르시아 만을 오가며 무역을 하다가 색목녀를 아내로 맞거나 이슬람교를 믿는 이도 있었지만, 이지 본인은 중국의 전통문화 안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훗날 노장과 선종, 기독교까지 두루 섭렵한 이력으로 인해 그의 사상은 중국 근대 남방문화의 결정체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는 26시 때 거인(擧人)에 합격해 하남·남경·북경 등지에서 줄곧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운남의 요안지부를 끝으로 퇴직했다. 이지는 40세 전후 북경의 예부사무로 근무하던 중 왕양명과 왕용계의 저작을 처음 접한 뒤 심학에 물두했다.
나이가 들어 불교에 심취하고는 62세에 정식으로 출가해 절에서 기거했다. 그는 유불선의 종지가 동일하다고 인식했고, 유가에 대한 법가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소설과 희곡 같은 통속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평론 활동을 폈다.
유가의 정통관념에 도전하는 <장서>를 집필했고, 공자가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경전을 해설한 <사서평>을 출간했으며, 선진 이래 줄곧 관심 밖에 있던 <묵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했다.
이렇듯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고 송명이학의 위선을 폭로한 그에게 세인은 양쪽으로 갈려 극단적인 평가를 부여했다. 결국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있던 중 76세에 스스로 생을 마쳤다.
그의 저작들은 명·청대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빌린 수많은 위작 또한 횡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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