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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좋은글

인간변화 핵심은 채움 아닌 비움

등록 2011-08-01 16:32

2009년 3월 일본 나리타공항의 페덱스화물수송기 추락사고 당시 파손된 항공기 이 글은 휴심정과 각 종교인, 심리학자 등 10명이 함께하는 `인간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 토론회에서 이정배 감신대 교수(기독자교수협의회회장)이 발표한 글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 앞에 서있다. 뭇 이론으로 설명하자니 내 경험과 무관한 것이 되고 본인의 지난 삶을 성찰하여 답하자니 달라진 것이 크게 없어 부끄럽다. 그렇기에 이 두 시각을 함께 엮어 가능한 한 솔직하게 본 주제를 다루는 것이 좋을 듯 여겨진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관계하여 달라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물질에 대한 욕망, 성적 충동 그리고 명예욕 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때 이 고민 때문에 소위 성직의 길에 들어섰으나 지금도 그 시좌(視座)밖에 서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고 더욱이 자기 합리화에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달라지고 싶은 삶의 열망을 갖고 살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그 때 소싯적 물음을 되묻고 있는 자신을 직시할 때 주어진 과제가 한없이 버겁게 다가온다. 굳이 인간우월(중심)주의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나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한없이 고맙고 귀하다. 비록 태어난 환경 차로 태생적인 불평등이 삶을 지배할지라도 인간의 탄생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다. 주지하듯 종교는 저마다 다른 방식이긴 하나 예외 없이 인간 탄생의 신비를 고지한다. 하여 인권을 위한 투쟁은 그렇기에 종교적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여전히 인간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세계 일각에서는 성차(性差)는 물론 종차(種差)의 극복을 말하고 있으나 인간 조건의 평등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인간 자체의 변화는 인간조건의 변화와 함께 생각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양자의 결합은 결정론적 충분조건은 아니겠으나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이는 인간을 종교적, 형이상학(심리학)적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사회적(경제적) 관점에서도 살펴야한다는 지당한 언술이다. 따라서 인간의 변화는 무엇보다 외부적 조건의 달라짐에서 비롯한다는 거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반추해도 같은 결론이다. 도시에서 시골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변화되는 삶의 환경에서 필자는 또래의 친구들과 달리 형성된 측면이 너무도 많다. 이는 결국 가족의 경제상황, 부모의 교육열 그리고 주변의 사회적 환경과 인간 삶이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적시한다. 물적 토 대의 차이로 인한 그 시절 친구들의 삶이 거진 반 결정되었고 오늘 세계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점에서 성서가 말하는 ‘기적’의 의미를 한 여성 신학자(D. Soelle)의 견해에 따라 되새김질 해본다. 기적이란 삶의 조건들이 변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음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자는 항시 부자로만 머물지 않고 가난한 자 역시 언제든 가난할 수만은 없으며 슬픈 자가 항시 그리 존재할 수만은 없다는 물적 토대의 변화, 바로 이것을 일컫는 말이 기적이란 사실이다. 하지만 물적 토대의 변화만으로 인간의 삶과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일리(一理)는 있되 온전한 진리는 되지 못한다. 환경변화 만으로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이해가 일천한 탓이라 보인다. 역시 성서에는 예수께서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그들 삶의 조건을 달리 만드셨으나 정작 자신에게 돌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 사마리아인 한 사람의 경우만을 들어 기적이라 명명한 까닭이다. 인간 마음의 근본적 변화는 물적 토대와는 결코 정비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다. 필자는 비행기 여행 중 기류변화로 비행기가 곤두박질치는 수차례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순간 일상(日常) 중 잘못한 것이 눈앞에 스쳤고 무의식중 神께 상황이 달라지기를 기도했으며 그 난관이 지나기를 바라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간곡한 청원을 무색케 할 만큼 이전의 나로 되돌아갔고 그리 살고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것 역시도 일종의 타성이 되어 그 간곡한 기도 자체를 스스로 믿지 않는 신앙적 누(累)를 범하고 있다. 이런 반복 하에서 신앙은 화급한 순간을 모면하는 방책으로 변했고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치 못하고 있다. 물적 토대의 달라짐이 결코 사람을 옳게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이처럼 이유하는 것이 염려되긴 하나 부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가 그렇듯 주변에서 종교를 가졌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진정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물론 사업실패, 사별(死別) 그리고 절망에 이르는 깊은 병 등을 계기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나 필자 보기에 그들 역시도 현실에 자신을 맞춰 살고 있을 뿐 인간 자신이 달라진 것이 아닌 듯하다. 언젠가도 말했듯 인간의 무의식, 곧 인간 몸속에 축적된 오랜 훈습이 고쳐지고 달라지지 않는 한 의식의 변화만으로 인간의 질적 달라짐을 희망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필자 역시도 인간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은 사람이다. 이 믿음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일 터인데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아직 확신하기는 일러 보인다. 그래도 이런 소망을 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종교적 성찰 때문이다. 하느님 형상(Imago Dei), 불성(佛性) 그리고 天命之謂性이 저마다 다르긴 하나 인간의 존재론(종교)적 기원을 일컫는 말임이 분명하다. 성서는 하느님 영이 한 번도 인간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하며 불교는 불성을 인간 마음 밖에서 찾는 것을 꾸짖고 있고 인간 본성을 제대로 알면 그것이 곧 하늘인 것을 유교 역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원죄보다 原因寵이 보편적 인간이해와 소통할 수 있는 기독교의 핵심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들 신적 ‘바탈’(多夕)이 예외 없이 개별성 속에 있는 까닭에 이 힘이 행사되기에 방해를 받는다.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생명은 저마다 살려는 의지를 갖고 있으나 남의 생명을 꺾어야 자기생명을 유지하는 불가해성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근원적 한계는 먹이사슬 구조 내지 생태적 질서로 해결될 수 있다. 문제는 탐진치란 말이 지시하듯 자기 확장의 덧이다. 오늘날 탐(貪)은 ‘자본주의’로 대변되고 진(嗔)은 ‘대학’으로 통칭되면 치(痴)는 ‘언론’을 적시한다. 이들 각각이 욕망과 적대감(경쟁) 그리고 어리석음을 대변하는 까닭이다. 이런 현실이 종교적 본성을 비웃고 조롱하며 신앙 역시 이런 삶을 부추기는 방향성을 띠고 있기에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난감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인간에겐 존재론적 향유만이 있지 않고 형이상학적 욕망(貪在神在) 역시 작용한다. 자신과 절대 다른 존재에로 향하려는 초월의 가능성, 곧 영성 역시 탐진치와의 대극적 힘으로 역할 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 고통 받는 이웃의 얼굴을 자신의 벽으로 느끼고 그것을 신적 계시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는 힘- 소위 ‘어려운 자유’- 이 항존 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불교적으로 ‘自利利他’의 세계이자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픈’ 세계를 창조해낸다. 필자는 이것이 앞서 언급한 인간의 종교적 기원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찌 달라질 수 있을까? 인간의 변화를 위해 종교는 즉각적 방식과 점진적 방식을 함께 제시한다. 불교의 頓漸 논쟁, 간화선과 위파사나의 관계도 그렇고 기독교의 칭의/성화론 역시 그 각각의 방식들이다. 이를 타력과 자력의 방식으로 대별하기도 하나 필자에게는 무익한 말이다. 온전한 자력, 절대적 타력만을 어느 종교에서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자력과 타력을 不二적 관계에서 보는 것이 옳게 생각된다. 갑작스런 신의 은총으로 인간의 변화, 소위 구원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매일 반복되는 종교생활(수행)을 통해 조금씩 다른 삶을 선택해가는 구도자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이런 反問도 가능할 수 있다. 지속적 물음(닦음) 없이 갑작스런 깨침이 가능할 것인지, 역으로 수행만으로 인간이 달라질 것인지 등에 관한 질문들이다. 이에 대한 답이 동서양적으로 다를 수 있겠으나 필자는 이를 결코 세계관의 차이로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은 본래 영원성(體)과 시간성(用)의 혼재된 상태로 존재한다. 영원한 것을 시간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인간 실존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이자 모순인 바, 누구든지 절로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역설과 모순을 감내하고 선택하는 것이 은총이며 돈오이고 동시에 책임이며 점수다(책임으로서의 은총). 이 경우 역설이란 동시성(Gleichzeitigkeit)을 얻는 삶을 뜻한다. 이는 인간 속에 하느님 영이 내주하여(God in us)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n Christo)가 되는 것을 뜻한다. 하여 키에르게고르와 본회퍼는 루터의 종교개혁 원리인 ‘신앙의인’(稱義)을 반쯤만 신뢰했다. 칭의 만으로 아직 그리스도와의 동시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견성, 기독교의 구원은 저마다 이런 동시성을 얻고자 하는 것인바, 인간의 전적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 유일한 자리(공간)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동시성을 신비적 방식으로만 언급치 않는다. 일찍이 본회퍼는 하느님이 인간 되신 것을 항차 인간을 神으로 만들기 위함이라 하였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 속에 늘상 함께 하듯 인간 역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때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고통 받는 이웃의 얼굴 앞에서 자율성과 효율성을 좇는 인간 탐진치의 좌절과도 결코 다른 말일 수 없다. 바람 부는 것을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 알 듯 인간의 구원은 자신이 맺는 열매(행위)를 통해 아는 법이기에 오늘의 진리는 ‘수행적 진리’(Performative truth)라 해야만 옳다. 하지만 남의 고통과 공감하는 일은 자기의식의 난파를 통해서만 철저해질 수 있는 법이다. 이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더욱 철저하게 사유했다. 그는 성육신의 신비, 즉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 사건을 빗대어 인간 역시도 자신의 시간성 안에서 영원을 만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의 全的 절망이 언제든 이를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실존 변증법을 통해 설명된 동시성으로서의 ‘신앙’은 일상적인 심미적, 윤리적 실존의 철저한 난파, 자신의 전적 무능함 일명 죄책의식 속에서만 生起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것과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것과는 상대적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존재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절대적인 것과는 상대적 관계를 맺고 상대적인 것에는 마음을 절대적으로 빼앗기며 살고 있다. 이런 정황에서 인간을 전혀 다른 존재로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내가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할 때 우리의 상대적 미래-보험, 은퇴, 자년교육 등-만이 떠올려진다. 자신을 無化시킬 수 있는 죽음, 절대적 미래가 실상 흉중(胸中)에서 실종되어 버린 탓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책의식은 불교가 말하는 絶代 無와 이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것은 모두 자신에게서 절대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각성으로서 자기의식(상대적 미래)의 난파를 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간을 기독교는 영원성이 시간에 개입한다고 보고 불교는 연기적 존재를 말하고 있는 듯싶다. 종교 철학자 카푸토는 이렇듯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종교가 탄생할 수 있음을 역설했다. 무의식의 훈습까지 폐기할 수 있는 자기의식의 난파, 바로 이것이 인간이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인 바, 종교의 길이란 것이다. 이점에서 신앙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라기보다 자신을 빈 그릇으로 만드는 일이라 보는 것이 옳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선행(善行)의 종교적 차원을 적시한다. 윤리, 도덕이 중요하고 필요하나 자기과시가 되는 경우 그것은 인간 삶의 달라진 모습의 결과가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종교가 일상 삶에서 너무 유리된 듯 보일 수 있다. 점차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교육과정 자체를 과소평가하는 누(累)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이고 수신제가를 말하는 유교적 입장에선 수용키 어려운 부분이라 여겨진다. 이는 일상에서 절대적 미래를 향한 의식의 난파가 어찌 한순간 가능한 일인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불교에 대한 유교 비판이 있었고 ‘漸悟’돈수란 말이 불교에서 회자되는 것이다. 최근 미국 등지에서 발달 심리학(E. 에리슨)이란 분야가 융성해지고 있다. 인간의 선천적 성향만이 중요치 않고 어린 시절 요람의 상황이 일생을 결정짓는 요인도 아니며 성인기의 전 과정을 거치면서 삶이 점차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이 점에서 6단계에 걸친 공자의 인간상이 -뜻을 세우고, 확고히 하며, 미혹되지 않고, 하늘을 알게 되고 모두와 소통하며, 무슨 일을 해도 어긋남이 없다- 크게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삶의 과정에 주기가 있다는 것으로 다음 단계에서 보면 전단계의 삶을 얼마든지 상대화시킬 여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껏 교육이 성인기 이전 상태만을 주목했다면 성인기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달라질 수 있기에 중장년 이후의 삶 역시 방치할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속성에 대한 강조가 되겠다. 인간이 한번 다르게 행동할 수 있으나 그것을 지속적으로 이끌 힘(영성)에 대한 필요성인 셈이다. 인간 삶의 전 과정이 성숙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것으로 지향할 삶의 목표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개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인류와 문명이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있을 때 인간은 고착화된 장년기 이후라도 달리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에게 聖人之道의 길이 목표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자신을 달리 만드는 동인(動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이를 위해서 각 종교들은 끊임없이 공동체를 통한 자신들의 의식(Ritual)을 정성껏 수행할 책무를 더 한층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지속적 의식화(교육)을 통해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유교적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이정배 감신대 교수, 기독자교수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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