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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좋은글

똥 푸는 아저씨와 행복한 동거

등록 2011-08-18 16:31

양평동 판자촌에 살 때다. 마을의 공동화장실을 치우는 임씨라는 아저씨가 있었다. 약간의 정신지체와 알콜리즘이었던 아저씨는 낮엔 똥을 푸고, 저녁나절부터는 술에 절어 골목길을 막고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길거리에 나뒹구러져 있곤 했다. 잠자리는 포장친 리어카였고 식사는 거의 생라면이나 마른 건빵을 먹었다. 그 시절 양평동 곡목길 풍경은 매일 이 임씨와 함께 그려진다. 날씨가 꽤 추운 어느 날, 임씨는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정일우 신부님은 임씨를 병원으로 모셔 갔고, 죽을 고비를 넘긴 임씨는 그날부터 우리와 한집에 같이 살게 되었다. 언제 벗었는지도 모를 신발을 벗기니 겹쳐 신은 양말이 아홉 켤레나 되었다. 양말은 완전히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정 신부님은 한번도 씻은 적이 없는 것 같은 임씨의 몸을 씻겼다. 그리고 겨우 혼자 누울 수 있는 신부님 방에서 임씨와 함께 주무셨다. 모로 누워 둘이서 코를 박고… 그런데 문제는 그날 이후부터였다. 임씨는 변을 보고 변을 닦지 않는다. 씻기지 않으면 씻지 않았다. 냄새가 코를 찔러 함께 앉아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신부님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은 한 인간에 대한 끈질긴 신부님의 노력,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했던 모습과 같았다. 이 모습은 우리가 가장 소망하는 사랑이 그 사랑을 받을만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느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받을 뿐이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모습이었다.(신명자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이사장)

나의 큰스승인 정일우 신부님은 어떻게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변화시켜내는지를 알고 계셨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계셨다. 면담 때도 다른 휴식 시간 때도 단 한번도 사람을 꾸짖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시시비비를 따지고 옳은 것을 가리키며 말로 가르치려 하고 다스리려 하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고, 또한 그런 식의 교육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신부님 스스로 잘 알고 계시는 듯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큰 신뢰를 품고 계시는 듯 했다. 사람인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옳게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종국엔 스스로가 알아서 자기의 올바른 길을 찾아가며 변화되어 가고 성장해 가는 것임을 깊은 차원에서 확신하고 계시는 듯했다. (유시찬 신부. 서강대 이사장) 정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면 강론이 없어도 뭔가 움직이는 느낌, 어디서 오는 힘인지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게 된다. 상당히 예민한 성품을 가진 정 신부님은 잘 삐치기도 한다. 제정구씨와 둘이 한번 싸우면 상당기간 말도 안하고 지낸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것은 끊임 없이 기다린다. 서로 말을 안하고 지내면서도 계속 기다리는 그래서 나중에 보면 무엇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런 가식이 없는 신부님은 청년들에게 편안함을 주셨다. 청년들을 많이 사랑해 주셨고 얘기를 그저 그냥 들어주시며 웃어줬다. 술도 같이 마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대해 주셨다. 처음에는 성직자로 생각했는데 생활을 통해서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어떤 느낌이 강하게 왔다. "참으로 대단한 내공을 가지신 분이다. 전혀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복음자기 가족들 인터뷰) ` 예수회신부' <정일우 이야기>(제정구기념사업회 엮음 펴냄)에서 정일우 신부(1935~)=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다. 1953년 예수회에 입회해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60년 한국에 와서 1961년부터 3년간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963년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66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예수회 부수련장, 수련장을 맡으면서 철학과 영성신학을 가르쳤다. 1973년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의구심이 들어 청계촌 판자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도반 제정구를 만났다. 1975년 양평동 판자촌 생활을 시작으로 철거민 집단이주 마을로 1977년 복음자리, 1979년 한독주책, 1985년 목화마을을 건립했다. 1980년대는 목동, 상계동 등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에 함께했다. 1991년 한몸공동체 초대원장을 지냈다. 1994년 11월부터는 잊혀진 존재 농민 속에서 살기로 하고,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서 예수회 누룩공동체를 이루어 농부로 살았다. 2002년 4월 예수회 사회사도직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예수회 제3수련장을 맡았다. 김수환 추기경 생전에 김 추기경의 영성지도 신부를 맡아 영성 수련을 지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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