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_ 수행, 수도, 명상을 통해 행복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각박하고 외로운 현대인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 수도, 명상, 심리, 치유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밖에서 만 갈구하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기를 깨닫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현실에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한 생활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휴심정을 찾는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
13.기천어떤 강함이 이 부드러움을 누를 것인가
기천은 기(氣)와 단(丹)을 수련하므로 단학(丹學)이고,철저한 예절을 익히므로 예학(禮學)이며,춤과 소리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藝學)이며,아프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활명법(活命法)이고,궁극적으로 하늘과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깨우치는 도학(道學)이다.
기천(氣天)은 직접 해보기 전에는 그 신묘한 힘과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기천은 세상에선 산중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어온 절정의 무예로 곧잘 알려져 있다. 철저히 몸 수련을 하며, 이를 통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무예다.
기천은 초대 문주인 박대양 진인이 1960년대 말에 하산한 뒤 십대 후반의 나이로 수많은 무술계의 도전자를 제압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천의 2대 문주인 박사규 씨도 1970년대까지 전국적인 무술대회에서 시범을 보이던 합기도의 고단자였다. 그는 당시 전국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대련을 하던 중 절정의 고수가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양진인을 찾아갔다가 단 한 수에 무릎을 꿇고 기천에 입문했다. 박사규 문주는 직접 기천을 수련해보고 무협지나 무협영화에나 보고 가공 현실 정도로 알았던 것들이 현실에 버젓이 있다는 놀라움에 기천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내가 기천을 처음 접한 것은 대양진인이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에 막 도장을 냈던 10여 전이었다. 그때 처음 만난 대양진인의 모습이 뼈마디가 굵은 무인체질이라기보다는 도저히 무예를 할 사람의 몸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너무나 왜소한 것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대양진인은 불과 키 155센티미터 단구다. 그렇게 키가 작은데다 팔이나 다리의 굵기도 십대 초반 소년처럼 얇다. 그런 골격으로 치기어린 수많은 도전자들을 꺾었다니,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천은 머지않아 무예라기보다는 수행으로 다가왔다. 기천은 동굴에서 곰이 쑥과 마늘만 먹으며 버텨내 사람이 된 것과 같은 인고를 요구한다. 날랜 무예를 하기엔 몸치인 내겐 오히려 기천의 그 점이 매력이었다. 기천에서 가장 기본적인 수련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내민 채 무릎을 구부려 기마자세로 서는 '내가신장'이다. 정식명칭은 기천태양역근마법내가신장(氣天太陽易筋馬法內家神掌)이다. 무릎을 많이 구부리고 자세를 낮추면 초보자는 5분도 서 있기 어렵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딱 10분만 서 있어도 얼굴에 난 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질 정도다. 내가신장은 우리 몸의 진기(眞氣)를 가장 효과적으로 모으는 동작이라고 한다. 무예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동공뿐 아니라, 이처럼 고요히 서서 하는 것이 인고의 수행이다.
그렇게 내가신장의 매력에 빠지기는 했지만 처음 몇 년간은 그리 열심히 수련하지 못했다. 정작 기천을 마음먹고 수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2003~2004년 인도와 히말라야의 요가아쉬람 등에서 요가를 해본 뒤였다. 인도의 요가를 체험한 후 요가보다는 동양적 선도가 내게는 더 잘 맞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돌아온 뒤 매일 아침 기천을 수련했다.
2005년 겨울엔 기천 지도자 수련인 칠보절권 과정을 거쳤다. 칠보절권은 많은 적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비법의 무예다. 기천의 동작이 그렇듯이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몸짓으로 힘을 모아 응축시켜 폭발적인 파괴력을 지닌다. 칠보절권은 기천 내에서도 고도의 무예이긴 하지만, 고수들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나 같은 몸치도 그 묘리를 터득하며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게 대양진인의 힘이었다.
10주간 매주 토요일에 두 시간씩 강도 높은 칠보절권 수련과정에 참가하는 사람 중엔 당뇨와 고혈압을 앓던 사십대 남자도 있었다. 그는 칠보절권을 하면서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당뇨에서 벗어났고, 혈압도 정상수치로 돌아오는 경험을 했다.
칠보절권 과정을 마친 뒤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새벽에 방안에서 기천 수련을 했다. 물론 대풍역수와 같은 칠보절권의 수도 했지만, 가장 주력한 것은 기본주의 기본인 내가신장이었다. 내가신장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1초 1초가 고행이다. 전신에 마치 비상 사이렌을 울리는 것만 같다. 몸에 비상사태를 선포해서 몸이 비상한 상태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단순히 팔을 뻗고, 엉덩이를 내밀고, 무릎을 구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역근이다. 역근은 손목과 발목을 비롯해 모든 동작에 근육을 비틀어서 힘을 준다. 기천의 파워는 이 역근에서 나온다. 같은 팔이라도 그냥 내려치는 것과 역근을 해서 내려치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역근은 상대에 대한 파워 뿐 아니라 내적 파워를 키워준다. 역근이야말로 기(氣)를 가장 잘 발생시키고, 기를 단전에 집결시킨다. 기천 설화에선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도 백두산에서 기천 고수인 천선녀에게 역근법을 배운 뒤 소림사로 들어가 '달마역근경'을 완성했다고 전한다.
역근한 채 내가신장 자세로 서 있으면 5분만 지나도 역근을 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매초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 고통을 감내하다 보면 기가 모이는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스스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기천을 시작할 때는 지(地)-천(天)-합(合)-틀-무(無)의 과정을 거쳐 마법 자세를 잡는다. 지는 땅의 기운을 받아들여 강하고 묵직한 기운을 사용하며 힘을 아래로 누르며 낮추는 것이고, 천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이 둘을 합친 뒤 어떤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동(不動)한 무의 경지에 서는 것이다.
나는 처음엔 내가신장을 10분부터 시작해, 10일마다 1분씩 늘려갔다. 10일간 10분을 서고, 11일째부터 20일째까지는 11분, 21일째부터 30일째까지는 12분……. 그렇게 60분까지 서는 사이에 어린 시절부터 늘 발목을 잡곤 했던 허약체질이 변화됐고, 매년 연례행사처럼 치르던 감기에서도 해방됐다.
기천 수련은 특히 수련에서 오는 부작용과 장애가 없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대부분의 단전호흡과 달리 기천에선 의도적으로 호흡을 조작하는 일이 없다. 그냥 내가신장을 비롯해 정해진 동작을 취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이 되기에 따로 호흡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광화문 도장에서 시작된 기천 수련은 김영기 원장, 임계환 범사, 김희상 원장 등을 만나면서 꾸준히 이어졌다. 조진식 범사는 한겨레신문 동아리에서 지도했는데, 변함없는 성실한 자세로 수련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대양진인으로부터 북두칠성검법을 전수받은 전인이며, 대양진인과 함께 칠보절권 과정을 이끌었던 강난숙 범사는 헌신적이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마음 자세로 기천이 무예를 넘어 심법(心法)임을 보여주었다.
기천은 박사규 문주와 이런 수련자들 외에도 경찰계 검도의 달인으로 꼽혀온 박성권 씨, 수벽치기의 전인 육태안 씨, 해동검도 총관장 김정호, 나한일 씨 등이 배울 만큼 고도의 무예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기(氣)와 단(丹)을 수련하므로 단학(丹學)이고, 철저한 예절을 익히므로 예학(禮學)이며, 춤과 소리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학(藝學)이며, 아프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활명법(活命法)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늘과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깨우치는 도학(道學)이다.
기천이란 하늘과 땅의 모든 기운을 담은 대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한민족 고유의 선도(仙道)다. 선도는 동양의 사상과 종교, 예술, 문화의 뿌리가 되어왔다. 기천은 옛날 현묘지도(玄妙之道)와 풍류도(風流道) 등으로 불린 선도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 그 선도에 입각해 고조선의 홍익인간의 정치가 있었고, 고구려의 선인도와 조의국선제도와 백제의 소도무사, 신라의 화랑도, 발해의 진종교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고 전한다.
기천 설화에 의하면 검은웃[早衣]의 수련복을 입고 기천을 수련한 고구려 조의선인의 지도자인 조의두대형의 지위에 오른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기천에 입문해 많은 무학을 전수받고 마침내 상박권의 절기를 수행하던 중 끝내 고행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했다. 그 후 연개소문은 입당해 당 태종의 팔대장군을 기천으로 모두 제압하고 중국의 무림까지 평정한 뒤 고구려로 돌아왔다.
기천은 신라 시대 이후엔 정사에서 그 모습이 사라지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도리나 방법, 건강법, 민속놀이 등에 그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맥은 '기천 지킴이'들에 의해 깊은 산중에서 비전(秘傳)되어 면면히 이어져왔다. 애초 선도의 총본산인 대풍산(大風山·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천의 흐름이 태백산으로 옮겨지고, 현대엔 기천의 마지막 전인인 대양진인이 설악산에서 하산하면서 드디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됐다는 것이다.오랜 외침과 외세와 사대부들에 의해 우리 것이 철저히 파괴된 우리나라에선 우리 것의 사료가 빈약하기 그지없어 우리민족 고유의 것들은 고증 자체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고유의 몸짓과 결은 우리의 유전자와 문화 속에 살아있기에 체감은 본능적으로 할 수 있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나름의 그런 고증을 거쳐 기천을 전통 무예로 받아들였다. 초대 문교부장관으로 민족의 얼 찾기에 관심이 많았던 안호상 선생은 생전에 "제가 지난 1세기 동안 많은 무예나 심신수련법을 보아왔지만, 기천만큼 민족 얼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강렬한 그리고 힘찬 몸짓을 본 적이 없다"고 평했다. 또 1960~1970년대 대한검도계의 원로로 경찰 출신인 박성권 씨는 전통 무예의 뿌리를 찾기 위해 만주와 중국까지 다녔고, 백두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던 중 무예인들이 은둔하는 마을까지 찾아낸 인물이다.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일본 검도를 비롯해서 중국 검법에 정진해오며 우리 조상의 검법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중 대양진인의 검법에서 비로소 우리 무도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대양진인이 입산해서 수련하는 일련의 과정은 마치 한편의 무협지를 연상케 한다. 대양진인이 입산한 것은 다섯 살 무렵이라고 한다. 설악산 계곡에서 '용'이라는 이름의 어린아이가 얼음을 지치며 놀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것을 한 노인이 구해주면서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후에도 설악산 보광사에서 놀던 용은 그곳에 종종 내려오던 노인을 볼 수 있었고, 노인은 어린 용을 무척 귀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용의 어머니에게 용을 맡아 기르겠다고 하고 산중으로 데려갔다. 그 노인이 바로 대양진인의 스승 원혜상인이라고 한다. 대양진인은 동굴에서 살면서 처음 3년간 내가신장만 서다가 그 후 혹독한 수련을 했다. 대양진인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은 그때 어린 나이에 산에서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혜상인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젊어 보이고, 경공술로 산을 날아다닐 정도로 날렵했다고 한다. 보광사의 노승이 원혜상인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러 대양진인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내가 너만큼 어렸을 때도 저분은 할아버지였다"고 답했단다.
깊은 산속에서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던 중 대양진인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면서 하산하겠다고 말했다. 원혜상인은 3년만 더 수련을 하고 내려가라고 당부했으나 결국 대양진인은 그 길로 하산했다고 한다.
산짐승 같은 모습으로 하산한 대양진인은 바깥세상 사람들을 처음 보고, 덩치가 자신보다 두세 배는 되어 보일 만큼 커서 놀래 겁을 냈으나, 며칠이 지난 뒤 자신이 살짝 밀기만 해도 저만큼 나가 떨어질 만큼 기가 없이 허우대만 큰 것을 보고 더욱 놀랬다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나도 10여 년 전 대양진인과 교유하며 살아왔다. 그동안 본 대양진인의 모습은 세상인의 그물로 잡을 수 없는 바람 같은 존재다.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과 파격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곤혹스럽게 하고, 궁지에 몰아넣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또한 순박함은 가히 꾸며서 가꾸기 어려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그는 "기천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무게도 형체도 이름도 없으므로 일체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고 강조한다. 그가 수련을 지도할 때는 매섭기 그지없다.
언젠가 대양진인이 여제자 강난숙씨에게 북두칠성검법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았다. '북두칠성검'이라 이름 붙여진 칼은 싹둑 자를 수 있는 평면 날이 아니다. 삼각형이다. 피라미드처럼 끝은 뾰족하니 창으로 쓸 수도 있다. 대양진인이 산중에 머물 때 원혜상인이 지녔던 검이다. 북두칠성검은 상대를 죽이는 살인검이 아니라 상대의 막힌 혈을 뚫어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활인검이며, 옛날 임금이 어사에게 호신용으로 하사했다는 칼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스승에게 배웠지만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대양진인은 북두칠성검을 강난숙 씨에게 전수하기 위해 조용히 칼을 들었다. 짐승 같은 감각이 첫 순간부터 번쩍였다. 첫 동작에서 그가 뺀 것은 칼이 아니라 칼집이었다. 거창한 손짓으로 칼을 뽑는 게 아니라, 왼손으로 가볍게 칼집을 뒤로 빼니, 벌써 완벽한 방어 자세다.
칼끝은 무엇을 겨누는가. 정신을 하나로 모은 칼날이 번뇌를 자르는 취모검인 듯했다. 정신이 모아진 칼이 한 번 움직이니 산을 옮기는 듯 엄중했다. 작은 체구의 무게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속 기운을 쌓는 '내가신장'으로 얻은 공력일 것이다.
몸은 산과 같되,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칼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사람이 칼을 움직이는가, 칼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천지의 기운이 사람과 칼을 움직이는가. 기천은 곧 천기. 맑은가 했더니 흐리고, 어느새 폭풍우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르는 말과 같은 비마축지법으로 왼발과 오른발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치 빠르게 교차했다. 걸음걸음가 나르는 구름 같았다. 그림자조차 쫓기 어렵다.
더구나 파격의 연속이었다. 오른쪽을 치는가 했더니 칼은 왼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휘어도는 손은 화려한 꽃봉오리였다. 이어 닭이 외발로 서 있는 것과 같은 자세에서 바닥을 치고 오르더니 칼이 공중에서 땅을 향해 도리깨질 쳤다. 눈앞에 별똥별이 튀는 듯했다. 흐름은 물처럼 부드럽지만 칼이 집중하는 곳에서 불같은 열기가 쏟아졌다. 춤처럼 부드럽지만 강했다. 산중에서 거친 바람과 함께 노닐고 달과 함께 자면서 나무와 바위와 부대끼며 쌓은 공력이있다.칼은 물결처럼 부드러웠다. 기천 동작의 원리는 하나같이 반장이다. 태극문양처럼, 혹은 원으로 공중을 가른다. 사악한 마귀를 처단하듯 양쪽으로 가르는가 싶더니, 다시 하나로 엮어내고, 원으로 품어 안았다. 무술이라기보다는 춤이었다.
어떤 강함이 이 부드러움을 누를 것인가. 칼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칼은 사람을 죽이고, 또 능히 살릴 만했다. 그 칼이 춤을 추었다. 기천인들이 하늘이 준 글로 여기며 왼다는 기천명(氣天銘)을 몸짓으로 쓰는 것만 같다.
氣武天然(기무천연) 기천무학은 자연 그대로이며 身活心明(신활심명) 몸은 활기차고 마음은 밝도다 眼光透靑(안광투청) 눈은 맑고 푸르며 一態美嚴(일태미엄) 한 자세는 아름답고도 엄하도다 手手華英(수수화영) 손 씀씀이는 화려한 꽃봉오리요 步步飛雲(보보비운) 걸음걸음은 나르는 구름이라 神氣鬼影(신기귀영) 신의 기운이요 귀신의 그림자이니 無虛無實(무허무실) 허도 없고 실도 없도다 武道暗香(무도암향) 무도란 은은한 향기와 같은 것 岩中石花(암중석화) 바위 속에 핀 돌꽃이라 同遊狂風(동유광풍) 미친 바람과 함께 노닐고 同宿醉月(동숙취월) 취한 달과 함께 자노라 一拳打魔(일권타마) 한손의 지름은 마를 부수고 一劍破邪(일검파사) 일검의 내리침은 사악함을 가른다 心如浮雲(심여부운) 마음은 뜬구름 靈光照天(영광조천) 영롱한 빛이 하늘에 비추인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북두칠성검삼각형 모양이어서 ‘삼성검’으로도 불려…삼각형 모양 창포검 막힌 피도 뚫어내
박대양씨는 북두칠성검을 산중 수련 뒤 하산할 때 갖고 내려왔으나 분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증언을 들은 제자들은 삼각형으로 된 칼이 창포검으로 전해져왔음을 국방연구소 자료 등을 통해 발견했다. 창포잎처럼 생겨 창포검으로 불렸으며, 칼이나 창으로 사용하던 호신용 무기로, 내공이 강한 사람이 사용하면 천하무적이라는 것이다.
박씨는 우리 민족 정기의 발원지인 백두산의 백두는 북두에서 나온 말이며, 북두칠성검에는 대륙을 호령하던 조상들의 얼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지금이 어느 때보다 한민족의 얼이 필요한 시기여서 30여년간 공개하지 않던 검법을 우리 얼의 ‘지킴이’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강난숙씨에게 전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사부’로 부터 1년여간 이 검법을 전수받은 강씨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두고 내가 전수받는 게 부담이 너무 컸다”며 “사부님은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어서 정신이 팔릴 때는 여지 없이 맞아가면서 배웠다”고 말했다. 검술은 어느 무예보다 공력이 필요하다. 몸이 너무 허약해 기천을 시작했던 그는 1년 전에 비해 놀라울 만큼 공력이 늘었다. 혼자 몸으로도 서기 어려운 내가신장을 무거운 두 남자를 등과 어깨에 태우고 설 수 있을 정도다. 도곡동 기천본문에서 강씨는 3월15일부터 매주 토요일 6주 동안 북두칠성검법의 전수에 나선다.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