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이오 주 톨레도 시의 샘 존스 시장이 불혹의 나이를 훨씬 지나, 저명인사 몇 명과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어느 지방 호텔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백 년 전인 당시에는 호텔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방명록에 자기 이름을 적는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맨 처음 사인을 한 유명한 목사는 자기 이름 뒤에 'D.D.(신학박사)'라고 적었다. 두번쨰 사람은 'Ph.D(철학박사)'라고 썼다. 샘은 자기 차례가 오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름 뒤에 'L.L.L.'이라고 적어넣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신학박사가 말했다.
"잠깐, 샘. 잘못 쓴 것 같은데. 자넨 대학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잖나?"
그러자 시장이 대답했다.
"천만에 말씀! 난 이래 봬도 인생의 역경이라는 대학을 다닌 몸이오. 우리 대학 교기의 색깔은 시퍼렇게 멍든 색이고, 구호는 '아얏!'이지."
"그럼 'L.L.L.'은 뭔가?"
샘이 말했다.
"그건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운다(Learning, Learning, Learning)는 뜻이네."
<스콧 니어링 자서전>(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실천문학사> 중에서
스콧 니어링
1883년 미국의 탄광도시 펜실베니아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는 1864년에 가족을 데리고 펜실 베이니아 티오 카운티의 모리스 런에 정착을 한 뒤 광산 회사를 운 영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할아 버지께서 경영하시던 광산의 노 동자들을 보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였고, 어머니는 에 너지가 넘치는 여자였으며 이상적인 여자였다. 어머니는 니어링 이 자연, 책,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니어링은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으로 할아버지를 뽑고 있다.
그는 1905년에 대학을 마치고 190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자 본의 분배문제를 깊이 연구했으며 왕성한 저술과 강연으로 미국 인들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아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 대학교에서 해직 되었다. 그후 톨레도 대학에서 근무하였으나 전쟁에 대한 비판 적인 견해를 주장하다 또다시 해직되었다. 1917년 반전 논문을 발표하고 1919년 연방법정에 피고인 자격으로 섰지만 배심원들 은 30시간에 걸쳐 논의한 끝에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러 나 사회로부터 위험분자 또는 과격분자로 몰려 소외를 당했다.
생의 후반기로 접어든 작가는 1928년 스무 살 연하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독립하여 자연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며, 사회를 생각하며 조화롭게 살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부부는 1952년 메인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였다. 1954년에 버몬트에서 산 기록을 『조화로운 삶』으로 펴내고, 1979년에는 메인에서 지낸 기록을 『조화로운 삶의 지속』으로 묶어 냈다.『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는 1954년에 처음 냈고 1974년에 개정판을 냈다. 스코트 니어링은 그 밖에도 『진보주의자의 양심』을 비롯하여 수 많은 책을 써서 많은 이들을 깨우쳤다. 스코트 니어링은 백 년 동안 살고 1983년에 부인 헬렌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는 스콧 니어링이 반자본, 반권력, 반전쟁을 몸소 실천하였던 스콧 니어링이 더나은 앞날을 꿈꾸며 지은 책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통하여 조화로운 삶을 찾아가는 방식을 찾으라고 말하는 저자의 이 책은 처음 쓰여진 때로부터 5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 문명비판서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지적하여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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