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장에 갇힌 한 개가 밖을 바라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 치료를 마치고 수도산으로 방사된 반달가슴곰 KM-53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수도산으로 돌아가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대목에서 멈추었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이라는 말이 전하는 저림이, 다른 저린 기억을 불러온다. 전기도살을 당하던 개가 사력을 다해 물어뜯어 납작해진 쇠막대에 대한 기억.
개 식용이 부당하다고 보는 논리가 있다. 가족으로 인정된 존재를 먹는 행위이므로 개 식용은 질서관념에 위배된다는 보수주의적 도덕관이 있고, 개 식용은 육식주의의 약한 고리이므로 당면한 철폐대상이라는 진보주의적 도덕관도 있다. 그런데 개 식용이 정당하다고 보는 논리는 찾기가 쉽지 않다. 안용근 식품영양학 교수의 2012년 ‘한겨레’ 기고문이 그나마 정당화의 근거를 제공한다. “개는 우리나라 음식물 쓰레기의 3분의 1을 먹이로 하여 연간 2100억 원의 처리비용을 절약시켜 주고 있다.” 개 식용 허용을 정당화할 근거가 빈약하다 보니 개 식용 문제는 정당과 부당을 심의하는 공론장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되고 개인의 자유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윤리 문제를 개인의 자유에 맡겨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동물법 문헌에서도 언급되는 주제이다. 미국 연방법원의 포스너 판사가 대형유인원의 법인격 문제에 대해 글을 썼고 이를 계기로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와 포스너 판사 사이에 여덟 번의 전자우편이 교환되었다. 여기서 포스너 판사는 “윤리학이 끈덕진 도덕 직관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동물이 비인간동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는, 윤리학자가 나서서 개인의 직관에 따른 선택에 영향을 끼치려 해서는 안 되고 ‘순수하게’ 개인의 자유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윤리학 없어지라는 말과 같다.
포스너 판사가 좀 심하기는 하지만 미국의 법, 그리고 사회와 정치 자체가 다른 서구 국가의 그것에 비해 유달리 개인의 자유라는 관념에 의존한다. 예일 로스쿨의 휘트먼 교수는 유럽의 문화를 존엄의 문화, 미국의 문화를 자유의 문화로 부르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언론의 자유와 재산권의 자유는 프랑스나 독일의 기준으로는 개인의 존엄을 훼손할 정도로 풀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면 인권을 위한 것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도 다 거부하는 데 이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18개 국제인권협정 중 불과 5개만을 비준하고 있고 파리기후변화협정을 탈퇴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개인의 자유라는 관념은 적절히 제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식용 개 농장의 뜬장에 갇혀 있는 개가 울타리에 코를 박고 있다. 김성광 기자
개 식용을 용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도 개인의 자유에 맡겨둘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문제는 말싸움하는 두 사람이 주된 당사자가 아니고,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개가 주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개는 담배처럼 자신이 태워지든 말든 관심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개는 사람처럼 죽음을 피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흡연의 자유 문제가 담배를 제외하고 사람만을 당사자로 하는 것과 달리 개 식용의 자유 문제는 개도 당사자로 한다. 일 년에 개장국 두어 그릇을 먹을 자유보다는 저 무시되지 않는 덩치에 깃든 생명이 훨씬 무겁기 때문에 개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당사자이다. 만약 개 식용 문제를 도덕관이나 산업적 필요, 기타의 논리에 따른 심의가 아닌 자유에 맡겨두기로 한다면, 개인의 자유가 아닌 ‘개견’의 자유에 맡겨두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그렇게 중시하는 미국에서도 작년에 개 식용의 자유를 부정하는 동물복지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한국에서도 개를 죽이는 것이 금지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올해 6월에 발의되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개를 죽일 시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공포 후 2년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되게 된다.
김영환 동물법비교연구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