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끼리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몸짓의 신호가 있을까? 적어도 말은 사람의 몸짓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20세기 초, 세상을 놀라게 한 말이 있었다. ‘한스’라는 이름의 이 말은 산수를 하고 여러 문제를 풀었다. 이를테면, 4 곱하기 3을 물어보면 12번 발을 구르고, 16의 제곱근을 물어보면 4번 발을 굴렀다. 사람들은 이 말을 ‘영리한 한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머지않아 한스의 ‘실체’가 밝혀졌다. 사실 이 말은 두뇌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표정과 자세 등을 읽고 미세한 변화가 생길 때를 포착해 문제를 맞혀왔던 것이다. 이후 실험자가 의도하지 않고 피험자의 반응을 조종하거나 단서를 제시하는 현상을 ‘영리한 한스 효과’라고 부르게 됐다.
최근 이 효과를 증명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영국 서섹스대학교 에이미 스미스 박사과정생, 영국 포츠머스 대학교 린 프룹스 교수 등 공동연구팀은 말이 인간의 몸짓언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지난 13일 생물학 저널 ‘동물인지’(Animal Cognition)에 논문을 내고 ‘말들은 정복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보다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에게 더 쉽게 다가간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말과 사람이 똑같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보편적인 ‘몸짓언어’가 있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어 주목된다.
실험에는 영국 남동부 이스트서섹스와 서퍽 지역에 있는 승마장 3곳의 말 30마리가 사용됐다. 말과 함께 실험에 참가한 이는 여성 10명으로, 어두운 색 외투와 검정 장갑, 청바지, 어두운 색상의 넥워머 등 동일한 복장을 했다.
실험 결과, 동일한 복장이지만 말은 정복적이면서도 당당한 자세를 취한 실험 참가자(왼쪽)보다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자세를 취한 실험 참가자(오른쪽)에게 더 많이 접근했다. 에이미 스미스 제공
연구팀은 여성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말 앞에서 서로 다른 자세를 취했을 때, 말이 어느 쪽으로 이동하는지를 살펴봤다. 한 여성은 팔과 다리를 벌리고 가슴을 부풀리며 곧게 서 있는 ‘정복적인 자세’(dominant posture)를 취했다. 다른 참가자는 팔과 다리를 몸에 붙이고 무릎에 힘을 뺀 채로 구부정하게 서 있는 ‘순종적인 자세’(submissive posture)를 취했다. 실험은 말 한 마리당 총
네 차례 실행됐다.
실험 결과, 첫 실험에서 순종적인 자세를 취한 사람에게 접근한 말은 총 22마리였다. 반면 정복하는 자세를 취한 사람에게 접근한 말은 8마리밖에 안 됐다. 또한 정복적인 자세를 취한 사람을 3번 이상 선택한 말은 한 마리도 없었던 것에 견줘, 순종적인 자세의 사람을 3번 이상 선택한 말은 총 23마리나 됐다. 중간에 실험에서 제외된 말 1마리와 두 자세를 각 2번씩 선택한 6마리의 말을 제외하면, 모두 순종적인 자세를 취한 사람에게 간 셈이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까? 연구를 진행한 린 프룹스 교수는 “진화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당당한 자세로 지배나 위협을 표현하는 반면 순종적인 자세로 복종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말은 정복을 피하고 순응을 선호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소극적인 자세의 참가자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1904년 청중 앞에서 ‘산수’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말 ‘한스’. 위키미디어코먼스 제공
마주 빌헬름 폰 오스텐과 영리한 말 한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에이미 스미스는 “이번 실험은 동물이 인간의 몸짓 언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실험적인 방법으로 증명해낸 사례”라고 말했다. ‘말이 행복한 사람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기존 연구가 있지만, 이번 실험에 참여한 말은 사람의 표정이 아닌 자세만을 인식했다. 표정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참가자가 모두 넥워머를 쓰고 실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이 연구는 다른 종의 동물끼리 얼마나 보편적이고 유연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유지인 교육연수생
yji9410@gmail.com,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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