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대상인 귀 없는 나방. 가슴에 털처럼 난 비늘로 박쥐가 내쏜 초음파의 대부분을 흡수해 위치 파악을 어렵게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토마스 닐 제공.
6500만년 전 박쥐의 등장은 나방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위장 무늬 등 시각적 교란으로 포식자를 피하던 이제까지의 전략은 쓸모없게 됐다. 박쥐는 초음파를 내쏘고 반사파를 통해 먹이의 위치를 파악하는(반향정위), 청각을 이용하는 전혀 새로운 포식자였기 때문이다.
나방이 획득한 새로운 방어전략은 초음파를 듣는 능력이었다. 박각시나방처럼 박쥐의 초음파가 들리면 방해 음파를 발사하는 앞선 방어 무기도 나왔다.
그러나 나방의 절반 가까이는 아직도 초음파를 듣는 귀가 없다. 긴꼬리산누에나방은 대신 기다란 꼬리로 초음파를 교란해 치명적인 첫 공격을 피한다(▶관련 기사:
나방 긴 꼬리로 반격 박쥐의 초음파 교란).
귀가 없는 나방 가운데 박쥐가 내는 초음파를 흡수해 반사파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포식자를 피하는 새로운 ‘스텔스’ 기술이 쓰이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 나방의 비늘에서 박쥐 초음파를 최대 85%까지 흡수하는 능력이 확인됐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능동적으로 주변의 소음을 죽인다면, 나방의 비늘은 미세구조를 이용한 수동적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발휘하는 셈이다.
시각으로 본 나방과 나비의 모습(왼쪽). 박쥐에게는 초음파가 반사된 음파로 구성한 오른쪽 모습으로 감지된다. 나방이 나비보다 반사파가 적고 가슴 부위가 특히 흐릿하다. 토마스 닐 제공.
토마스 닐 영국 브리스톨대 생물학자 등 이 대학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왕립학회 인터페이스’ 25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나방 가슴에 난 비늘이 넓은 주파수대(20∼160㎑)에 걸쳐 스텔스 코팅 구실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비늘은 얇고 가벼우면서도 넓은 대역에 걸쳐 여러 방향에서 오는 초음파를 효과적으로 흡수했다”고 밝혔다.
나방의 몸은 미세한 비늘로 덮여, 체온을 조절하고 꽃가루 등이 들러붙지 않도록 하며 포식자로부터 위장한다. 날개에는 비늘이 안장형으로 덮여 있지만, 가슴에는 털 모양의 비늘이 빽빽하게 나 있다.
연구자들은 가슴의 털 모양 비늘이 박쥐의 초음파 에너지를 대폭 줄이고, 박쥐가 나방을 감지할 수 있는 거리가 25%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나방의 생존율을 높인다는 사실을 모델링을 이용한 계산으로 밝혔다. 주 저자인 토마스 닐 박사는 “나방이 상업적인 방음기술과 비슷한 수준의 방음효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나 놀라웠다. 성능은 비슷해도 훨씬 얇고 가볍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귀 없는 나방 가슴 비늘의 주사전자현미경 모습. 닐 외 (2020) ‘왕립학회 인터페이스’ 제공.
연구자들은 “나방 가슴 비늘의 미세구조는 음파가 비늘의 털 사이로 연결된 공기주머니로 들어와 공기분자를 진동시켜 에너지를 잃도록 돼 있다”며 “그러나 일반 섬유질 흡음재료로는 이룰 수 없는 효과를 내는 미세구조가 더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수천만년 동안 계속돼온 박쥐와 나방 사이의 ‘진화 군비경쟁’은 아직도 계속된다. 귀 없는 나방이 스텔스 비늘로 박쥐의 초음파를 무디게 만드는 데 대항해 박쥐는 초음파를 내는 방식을 바꿔, 나방이 날아갈 때 나방 전체 모습이 아니라 날개가 번득이는 모습을 포착해 먹이를 사냥한다고 연구자들은 덧붙였다. 닐 박사는 “나방의 생물학적 흡음 시스템을 새로운 방음기술 개발에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용 저널:
Royal Society Interface, DOI: 10.1098/rsif.2019.0692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