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산골에서 해 먹는 계절별 음식을 다룬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스무 살 이치코(하시모토 아이 분)는 일본 산골 마을 코모리(小森)에서 혼자 살고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엄마와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혼자다. 한때 도시에 나가 지내다 다시 돌아온 이치코는 농사를 지으며 씩씩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말하면 이 영화는 계절마다 먹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마치 일본의 어느 산골에서 계절마다 나는 다양한 먹을거리를 보여주는 ‘먹방’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개봉될 때, 일본판 ‘삼시세끼’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계절별로 이치코가 음식을 해먹는 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여름철엔 식혜와 보리수 잼,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먹고, 가을엔 밤을 주워 요리하고 으름을 따먹는다. 이렇게 이치코의 일상은 농사지으며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으로 채워진다. 어쩌다가 동네 친구나 이웃과 나눠 먹기도 한다. 무언가 먹고 싶게 만드는 영화임이 틀림없다.
영화에 나오는 일본 산골 마을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소박한 밥상.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그린 같은 제목의 만화를 바탕으로 (순서대로) 여름, 가을, 겨울, 봄 편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두 편씩 묶어 개봉되었다(1편 여름과 가을, 2편 겨울과 봄). 매 계절 편은 이치코가 자전거로 장 보러 오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코모리(小森)는 도호쿠 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상점 같은 건 없어서 시장을 보려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갑니다. 가는 길은 대부분 내리막이라 자전거로 30분, 오는 길은 얼마나 걸릴까요? 겨울엔 눈 때문에 걸어가야 합니다.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반 정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다른 지역의 큰 슈퍼로 가는 듯합니다. 제가 거기에 가려면 거의 하루가 걸립니다.”
이치코가 해먹는 음식의 단순하면서도 긴 과정: 보리수 잼과 식혜
이치코가 먹는 음식을 들여다보자. 그 계절에 코모리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건 분명하지만, 잘 살펴보면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여름에 만든 보리수 잼이 그렇다. (영화에서는 산수유로 잘못 번역되어 있지만, 보리수이다.) 잘 익은 보리수를 한가득 따서 만들어도 마지막에 남는 건 작은 병의 잼이다. 그걸 내내 아껴먹어야 한다.
논의 풀을 뽑고 돌아왔을 때 마실 한 모금의 식혜를 만들기 위해서는 누룩을 넣어 하루를 발효한 후, 시간을 기다려 다시 걸러야 한다(여름 편). 겨울을 위해 감과 무를 말리는 과정이나 봄의 나물도 마찬가지다. 땅을 파서 얻은 쇠뜨기를 손으로 하나하나 다듬어 얻은 나물은 겨우 한 그릇이니까 말이다(봄 편).
봄에 수확한 햇감자와 개울가에서 뜯은 푸성귀로 만든 감자 샐러드. 훌륭한 아침 식사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봄 편 장면)
네 편의 영화를 잇는 힘: ‘엄마’와 ‘자신’을 찾아가기
이 영화는 계절의 흐름(여름, 가을, 겨울과 봄)을 따라 전개되지만, 그저 계절별로 맛있는 음식만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 서사가 있다. 이치코의 엄마(키리시마 카렌 분)는 어느 날 사라졌다. 그것도 갑자기. 이치코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다정하게 함께 살았던 엄마가 왜 갑자기 떠났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 이유는 모른다. 스무 살이 되면 엄마로부터 감자 빵 레시피를 받고 싶었던 딸을 이 작은 숲 마을에 혼자 둔 이유에 대해 이 영화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치코는 스무살이 되면 엄마로부터 감자 빵 레시피를 배우고 싶었지만 엄마는 갑자기 떠났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코모리(小森, 작은 숲)라는 마을 이름에서 왔을 것이다. 이치코는 지금은 이곳에서 살고 있지만 영 마음을 잡지 못한다. 엄마가 떠난 다음 잠시 도시로 떠나 살았던 때처럼 언젠가 다시 이곳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가 음식을 만들어 먹는 영화에서 그치지 않고, 각 계절 편이 하나의 서사를 중심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힘은 주인공 이치코가 겪는 갈등과 성장의 과정이다. 음식과 함께 ‘엄마’와 ‘자신’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을 잘 버무려 놓아 영화는 더욱 맛깔스럽다.
이치코의 엄마가 음식을 하던 방식: 푸성귀 볶음과 우스터 소스
이치코는 혼자 씩씩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 말없이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 이치코가 하는 음식의 방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모든 요리는 엄마가 해주던 맛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따라 하는 것이다.
모든 요리는 엄마가 해주던 맛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따라 하는 것이다.
엄마가 해주던 음식은 모두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이치코는 엄마의 푸성귀 볶음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철에 밭에서 난 푸성귀를 뽑아 씻고 썰고 간하여 볶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푸성귀 볶음 대신 “정성 들인 요리를 좀 먹어보자”고 투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가 떠난 집에서 자신이 할 때는 영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어떤 시도로도 뭔가 다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는 푸성귀 껍질을 하나씩 벗겨서 요리한 것이다(가을 편).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 줄기 볶음도 그렇다. 고구마를 심으면 고구마 줄기야 지천으로 널려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줄기를 똑똑 끊어가며 껍질을 벗기는 일은 매우 손이 많이 든다(요즘은 마트에서 껍질을 벗긴 채로 팔기도 한다).
사실 이치코의 엄마가 만든 우스터 소스도 가게에서 살 수 있다. 엄마가 만들어준 초콜릿 스프레드 역시 상품으로 나와 있다. 어릴 때부터 이치코는 엄마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이다. 엄마는 발라 먹어서(일본어로 ‘누테’) 누텔라라고 눙쳐 말했는데, 어느 날 가게에서 nutella라는 상표를 보고 놀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품화된 음식과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의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몇 시간을 들여, 또는 며칠을 들여 무언가를 만들어 먹을 여유가 없다. 이치코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신에게 음식을 해주던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떠나고 나서, 그리고도 도시 생활에서 돌아와 음식을 만들면서 ‘엄마’와 ‘자신’을 찾아 나선다.
시골에 돌아와 음식을 만들면서 ‘엄마’와 ‘자신’을 찾아 나선다.
더는 우리 옆에 존재하지 않는 ‘이치코의 엄마’는 무엇인가?
만화가 허영만은 자신의 장편 만화 식객(27편)에서 “음식은 어머니다”라고 소개한다. 이치코의 음식도 엄마의 기억과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되짚어가며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어머니의 음식’은 무엇일까? 정성이 담긴 몸에 좋은 음식, 유기농 재료로 만든 친환경 음식, 아토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음식 등을 떠올릴지 모른다.
물론 이 모두가 필요하다. 거기에 더하여 이 영화는 그 재료를 얻고 손질하여 먹기까지 자신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음식을 떠오르게 한다. 제철에 우리 동네에서 난 음식 말이다. 그 음식이 언제 어디서 나는지 알아야 하고, 하나의 음식이 나오기까지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런 과정을 잃어버렸다. 음식은 최종 상품의 형태로 대형 마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영화 제목인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는 그저 숲이 있는 산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치코가 두 번이나 떠났다가 결국 다시 돌아온 바로 그 곳, 코모리(작은 숲) 마을을 의미한다. 보다 넓게는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 또는 자신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무언가를 뜻할 수도 있다. 결국은 다시 돌아가야 할.
제철에 우리 동네에서 난 음식이 먹을만 한 음식이다.
작은 숲 마을(코모리, 小森)로 되돌아가기
엄마가 없는 코모리 마을을 처음 떠났던 이치코는 도시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껴 다시 돌아온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바로 이 기간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진정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이 마을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곳에 진정으로 마음 붙이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치코는 작은 숲 마을을 두 번째 떠난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 봄에는 긴 겨울 동안 먹을거리를 준비하지 않았다. 감자를 심지 않은 것이다. 이곳이 싫지 않으면서도 내가 왜 여기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그녀는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 다시 나서야 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5년 후의 봄. 그녀는 작은 숲 마을로 아주 돌아와 지낸다. 훌쩍 성숙하고 다부진 모습으로 말이다. ‘엄마’는 찾지 못했어도 ‘자신’은 찾았으리라.
으름덩굴. 작지만 바나나처럼 생긴 달콤한 열매가 열린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이치코와 나의 먹을거리: 으름과 바나나
내가 어릴 때 먹었던 으름을 이 영화에서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다(가을 편). 몸이 아플 때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바나나가 귀하던 시절, 바나나를 닮은 으름을 찾아 산의 덩굴을 헤매던 기억이 있다. 잘 익어 벌어진 으름을 발견하면, 씨는 많지만 부드러운 과육을 먹을 수 있다. 이치코는 친구와 함께 으름 씨를 멀리 내뱉는다(으름 껍질을 볶아 먹을 수 있다는 건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야생의 바나나는 으름과 마찬가지로 씨가 잔뜩 들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그렇지 않다. 우연히 발견한 씨 없는 바나나를 뿌리로 번식시킨 것이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 같은 병에 약할 수밖에 없다. 요즘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대부분 캐번디시라는 품종이다. 예전에는 더 달콤한 그로스 미첼이라는 바나나 품종이 있었지만, 바나나 전염병인 파나마병이 크게 돌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데 이젠 캐번디시 종마저 파나마병의 변종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다.(관련 기사:
“바나나, 추억으로만 남은 과일 될 수 있다”) 손쉽게 바나나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대량 생산하려면 기존의 열대우림을 파헤쳐야 하고, 단일 품종만 재배하니 생물 다양성의 감소로 인해 이러한 위험에 직면하기 쉽다. 우리가 상품으로 대하는 바나나의 모습이다.
세계의 바나나는 대부분 캐번디시라는 단일 품종이어서 자칫 질병이 돌아 몰살할 우려가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이치코와 나의 먹을거리: 유기농법 오리고기와 살충제 ‘유기농’ 계란
이치코는 주로 스스로 기르거나 숲에서 얻는 재료로 요리한다. 가끔 마을에서 나는 곤들메기(민물고기)나 오리를 먹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는 유기농법의 하나로 제초제 대신 오리를 풀어 논의 잡초를 제거한다. 집 청둥오리가 여름의 논을 헤집고 다니며 잡초를 뜯어 먹은 후, 언젠가는 우리의 먹을거리가 된다. 끓는 물에 오리를 담그고 털을 뽑아 없앤 다음 손질하여 맛있게 요리한다.
최근 문제가 된 살충제를 포함한 ‘유기농’ 계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오리가 어떻게 태어나서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이치코가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2년 전 ‘환경상식 톺아보기’를 통해, ‘유기농’ 인증에 그친다면 자연과 생명을 살리는 농업이라는 유기농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한다고 말한 바 있다.(관련 기사:
‘이효리 콩’ 그 이후, 소비자가 알아야 할 유기농 상식) 이치코나 엄마가 화학비료와 농약을 한 번도 안 주고 키운 푸성귀는 ‘유기농’이라고 이름 붙지 않는다. 어떤 인증절차를 거쳐야 ‘유기농’이 되는 셈이다. 유기농 인증 이후에는 허술한 현재의 인증관리 시스템을 고려한다면, ‘유기농 인증 표시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늘 던지게 된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에 위치한 한 양계장의 닭. 이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A4 한장 크기보다 좁은 곳에서 지내며 알을 낳는 닭의 밀집 사육 방식은, ‘닭의 복지’라고 하는 멀게만 들리는 이유에서만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보다 나은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서라도 바뀌어야 한다. 흙을 밟고 지내면서 제 몸에 흙을 끼얹어 진드기를 없앨 수 있는 닭에는 살충제를 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집집이 닭을 한두 마리씩 키울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시골에 부모나 친척이 없어도 방법이 있다. 나를 대신하여 닭을 키우고 계란을 제공하는 생산자와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는 협동조합의 원리가 있다. 적어도 내가 먹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는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먹을거리를 생산한 이에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완전 자연농법으로 토종닭 키우는 농부 시인 홍일선(63)씨.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도리(남한강변)에서 ‘바보숲 명상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모든 먹을거리의 (길고 짧은) 연결망: 이 땅의 ‘작은 숲 마을’을 찾아서
이치코가 자신이 살아갈 곳이 어딘지 고민했듯이 우리도 제대로 먹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서야 한다. 아무 고민 없이 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더는 배부른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몸에 좋다는 걸 먹고, 조금 비싸더라도 친환경 인증을 받은 걸 먹으면 되지 않나 싶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보다 분명한 원칙이 있다면, 나와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이 나오기까지 그 관계의 길이가 짧고 긴밀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치코처럼 직접 농사지어서 먹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방식으로 생산된 것을 먹을지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치코의 음식이 자신과 엄마를, 친구와 이웃을 연결하는 끈이었듯이,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내가 먹기 직전까지 이어져 오는 수많은 연결의 끈을 갖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오늘은 햄버거(햄버거병, 용혈성요독증후군), 내일은 계란(살충제가 포함된 계란),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새로운 먹을거리 문제에 잔뜩 긴장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 ‘슈퍼 사이즈 미’를 보면서 패스트푸드의 단점을 생각하고, 영화 ‘옥자’를 보면서 돼지고기의 기업적 생산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유럽산 ‘간염 소시지’ 논란이 일면서 식품의약품안전처가 24일 국내에 유통된 유럽산 햄과 소시지 유통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하지만 동시에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을 관통하는 원칙을 찾을 필요가 있다. 모든 먹을거리는 나와 길고 짧은 연결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가능하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이 짧고 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 출발은 오늘 내가 먹는 이 돼지고기와 햄버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는지 들여다보는 데 있다. 내가 먹는 햄버거(소고기)를 만들기 위해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초콜릿이나 과자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팜유를 얻기 위해 오랑우탄의 서식처가 훼손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치코의 엄마가 해준 그 음식은 슈퍼에서 판매되는 상품이 아니었다. 우리가 먹는 계란은 살아있는 닭이 낳는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판매되는 상품으로만 여긴다면, 살충제가 포함된 계란이 다음번에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상점이 없는 작은 숲 마을 코모리에 살 수는 없어도, 우리가 얻는 먹을거리가 어디서 어떤 과정을 통해 왔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연결망의 거리가 짧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마침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도 올해 촬영해서 내년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 땅에서 펼쳐지는 작은 숲 마을 이야기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김찬국/ 환경과교육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교원대학교 환경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