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이사 레슈코가 펴낸 책 <사로잡는 얼굴들>은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는 볼 수 없는 나이 든 농장동물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가망서사 제공
눈곱 낀 눈, 푸석한 털, 깊고 여유로워진 눈동자. 우리는 농장동물의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공장식 시스템 안에서 소, 돼지, 닭은 생후 6개월에서 2~3년 사이에 모두 도축된다. 매해 500억 이상의 동물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기’로 사라진다.
여기 조금 다른 모습이 있다. 따스한 건초에 코를 박고 누은 13살 돼지 테레사, 등에 고개를 대고 꾸벅꾸벅 조는 18살 칠면조 애시, 자유분방한 갈색털을 자랑하는 당나귀 17살 뱁스에겐 ‘노화’가 깃들었다. 그들의 얼굴엔 모든 역경과 세월을 견뎌낸 존재로서의 품위와 여유, 개성이 담겼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몸은 대체로 젊을 때 아름답다. 사진작가 이사 레슈코는 다른 모습에 집중했다. 작가는 10년간 미국 전역의 생크추어리(구조 동물들이 자연 상태에 가까운 환경에서 살도록 조성한 보호시설)를 돌며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동물들의 모습을 촬영해 책 <사로잡는 얼굴들>(가망서사)을 펴냈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가 2008년 친척 농장에서 우연히 만난 나이든 한 말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서문에 적고 있다. 34살의 말은 백내장으로 두 눈이 움푹 파이고, 관절염으로 절뚝였지만 점잖고 아름다웠다. 당시 연로한 부모의 질병을 수발해야 했던 그는 노화가 재앙이 아님을, 늙어갈 권리조차 없는 수십억의 동물들이 있음을 떠올렸다.
21살의 홀스타인 품종 소 베시는 생후 4년 동안 낙농장에서 임신을 반복하며 우유 생산자로 살았다. 은퇴한 젖소는 대부분 도축되어 햄버거용 고기나 반려동물의 사료로 만들어진다. 베시는 도축장으로 이송되던 도중 구조됐다. 가망서사 제공
이사 레슈코 작가는 2008년 친척의 농장을 방문했다 34살의 말 피티를 만나며 나이든 동물의 얼굴을 찍기로 마음 먹는다. 가망서사
작가는 생존의 귀중함을 섬세하게 포착하기 위해 10년이란 시간을 들였다. 동물의 내면을 정확하게 담아내기 위해 오랜 시간 동물들의 곁에 머물렀으며 그들이 작가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촬영 버튼을 눌렀다. 때문에 모든 사진은 조명이나 반사판이 배제된 채 자연광으로 촬영됐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진흙과 동물 배설물에서 보낸 뒤” 그가 우리에게 전한 모습은 홍은전의 표현처럼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동물의 얼굴’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24살의 당나귀 뱁스. 뱁스는 한때 로데오 올가미 던지기 연습 대상이었다. 가망서사 제공
개 범퍼는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됐다. 가망서사 제공
작품은 공장식 축산의 피해자뿐 아니라 다양한 동물 실험, 동물 노동에서 벗어난 동물들을 모델로 삼음으로써 그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동물의 초상 아래 간단히 적힌 구조 사연과 작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동물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슴이 저릿해진다.
농장에서 구조된 닭과 칠면조는 부리와 발가락이 잘려버렸고, 살이 잘 찌도록 개량된 소와 돼지들은 뼈가 자라는 속도보다 체중이 느는 속도가 빨라 골격 변형을 겪는다. 옴짝달싹 못 하는 농장 우리에서 태어난 그들은 대체로 심한 관절염을 달고 산다. 태어나 한 번도 밖에 나가본 적이 없는 돼지는 풀밭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7살의 흰넓은가슴칠면조 펄은 살아있는 동물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향하던 트럭에서 떨어졌다. 가망서사 제공
16살 양 보거트는 다른 양들과 무리지어 캘리포니아 앞바다의 산타크루즈 섬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살았다. 국립공원 관리국이 이들을 골칫거리로 여겨 살처분 계획을 세웠는데 실행되기 전 구조됐다. 가망서사 제공
그러나 정작 마음을 흔드는 건 학대의 흔적이 아니다. 그 모든 고통과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증언하는 모든 동물이 누려야 할 마땅한 삶과 기회다. 새들은 날개를 펴고, 모래 목욕을 즐기며 같이 사는 동물들과 우정을 나눈다. 돼지는 자신을 지켜주던 친구가 죽자 며칠이고 슬픔에 몸부림 친다. 늙어서 죽은 동물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인간들이 마음만 먹으면 수많은 동물들에게 줄 수 있는 당연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저명한 동물권 인사들이 이 책을 추천했다. 책은 미국 출간 당시 피터 싱어, 사이 몽고메리,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마크 베코프 등이 추천사를 썼으며 ‘뉴욕 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가디언’ 등의 매체가 호평했다.
27살 이상으로 추정되는 교배종 마리클레어는 캐나다에 위치한 농장에서 구조됐다. 임신한 암말의 소변을 채취해 호르몬 대체약물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농장은 암말들을 좁은 우리 사육하며 반복적으로 임신시켰으며 소변 농축을 위해 탈수 상태로 만들었다. 가망서사 제공
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해 별도의 주석을 달기도 했는데 국내 동물권과 생태 담론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한국 출간에 앞서 <고기로 태어나서>의 지은이 한승태 작가와 메일을 주고 받으며 한국 상황을 취재했고, 국내 최초 구조 돼지인 새벽이를 언급하며 국내 동물단체들에 대한 지지를 당부하기도 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