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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간과동물

아프고 늙어도, 달리지 못해도 괜찮아…‘말들의 쉼터’ 곶자왈에서는

등록 2022-10-20 16:41수정 2022-10-20 19:21

[애니멀피플]
15일 ‘제주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 시민 공개 행사
학대 받고 버려진 말 35마리 구조…“재야생화 목표”
제주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에는 말 35마리가 살고 있다. 경주, 승마에 이용되다 버려진 말들은 이곳에서 다시 말로서의 삶을 되찾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김지숙 기자
제주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에는 말 35마리가 살고 있다. 경주, 승마에 이용되다 버려진 말들은 이곳에서 다시 말로서의 삶을 되찾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김지숙 기자

어미가 돌보지 않아서, 척추 마비 증상이 보여서, 정형행동(석벽)을 보여서, 더이상 경주를 뛸 수도 사람을 태울 수도 없어서 말들은 버려졌다. 한때 수억 수천만 원의 상금을 벌어줬던 경주마도, 비육마로 태어나 농장에 살았던 말도 갈 곳이 없어진 것은 매한가지다. 이렇게 각각의 사연을 지닌 35마리의 말들이 제주 서귀포시 도너리오름 인근 곶자왈에 산다.

버려진 별밤을 받아준 말들의 대부

경주 트랙과 승마장을 오가다 폐농장에 버려졌던 ‘별밤’도 지난 8월 이곳 ‘제주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의 식구로 합류했다. 퇴역경주마 별밤(서러브레드 종)은 그야말로 굶어죽기 직전 구조됐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경마공원에서 경주를 했던 별밤은 이후 10년 간 여러 승마장을 전전하다 지난 여름 충남 부여의 한 폐농장에 버려졌다.

지난 8월 충남 부여의 한 폐목장에서 구조된 퇴역경주마 ‘별밤’. 구조 당시 별밤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하게 굶주린 상태였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지난 8월 충남 부여의 한 폐목장에서 구조된 퇴역경주마 ‘별밤’. 구조 당시 별밤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하게 굶주린 상태였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고, 사람을 태우는 오랜 노동으로 뒷다리는 심하게 부어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함께 발견된 ‘도담’의 상태도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엉덩이와 외음부,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어 피와 고름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을 구조한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는 4마리의 말이 있었지만 2마리는 구조가 이뤄지기 며칠 전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말들의 열악한 상황을 알게 됐지만, 부여군은 마땅한 보호방안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지난 15일 제주 서귀포시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말 ‘별밤’의 모습. 동물자유연대
지난 15일 제주 서귀포시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말 ‘별밤’의 모습. 동물자유연대

갈 곳 없는 말들을 받아준 곳이 바로 제주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다. 이곳은 프로골퍼 출신 김남훈 대표가 2020년 11월부터 다치고 버려진 말들을 데려와 돌보면서 시작됐다. 제주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말과 소를 키우는 집안에서  ‘농장 소년’으로 자랐다고 했다. 그러던 중 2019년 미국 골프투어 중 국제동물권단체 페타(PETA)가 폭로한 퇴역경주마 도축 현실을 접하게 됐다. 늘 고향 제주에 대한 자부심이 있던 그에겐 큰 충격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 대표에게 운명처럼 첫 말 ‘제이시’가 찾아왔다. 지인의 승마장에서 태어난 제이시는 어미의 돌봄을 못 받아 뼈 밖에 안 남은 상태였다. 그는 망아지를 데려와 우유를 먹이며 건강히 키워냈다. “딱한 처지의 말들이 자꾸 보였어요. 제이시한테 친구를 만들어 주자는 생각에 한 두마리씩 데려왔죠.” 그렇게 그는 “반려말 35마리를 키우는 사람”이 됐다.

말들은 달리는 걸 싫어한다

10월15일 말들의 보금자리에 처음으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별밤과 도담을 구조했던 동물자유연대가 퇴역 경주마들의 열악한 삶과 국내 최초 말 생크추어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시민 참여 행사 ‘말이 통하는 하루’를 마련한 것이다. 행사는 활동가, 시민 포함 10여 명의 소규모 인원으로 진행됐다.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의 주된 목표가 학대받던 말들이 보금자리 내에서 본연의 습성을 되찾고, 자연에서 재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제주 서귀포시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에서 대표 김남훈씨가 참가자들에게 말들의 구조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지난 15일 제주 서귀포시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에서 대표 김남훈씨가 참가자들에게 말들의 구조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이날 행사는 여느 유기동물 보호소 봉사처럼 밥 주기, 함께 산책하기 등으로 진행됐다. 당근을 써는 냄새가 68만 평 곶자왈로 퍼진 것일까. 참가자들이 당근과 사과를 들고 패덕(말 우리)로 가지고 가자, 쉬고 있던 말들이 사람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 대표 곁으로 다가온 초고령 말 ‘로렌’이 친근하게 겨드랑이를 파고 들었다. 보이지 않던 말들도 언덕 너머에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집 나가서 보이지 않던” 야생마 ‘모히칸’도 기웃거리며 무리로 다가왔다.

“보세요. 제가 핸드폰 보고 있으면 말들이 와서 같이 본다고 했죠.” 정말 말들은 스스럼없이 사람 곁으로 다가왔고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아직 엉덩이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도담도 간식을 받아먹으며 차분히 참가자들 곁을 지켰다. 퉁퉁 부어올랐던 별밤의 뒷다리도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담 별밤은, 말보호센터의 다른 말들처럼 사람에게 가까이 오진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김 대표는 학대받던 말들이 시설에 와서 다시 인간에게 다가오기까지 6개월~1년이 걸린다고 했다.

지난 15일 동물자유연대가 마련한 ‘말이 통하는 하루’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구조 말 ‘도담’의 돌봄을 돕고 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지난 15일 동물자유연대가 마련한 ‘말이 통하는 하루’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구조 말 ‘도담’의 돌봄을 돕고 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식사를 마친 말들을 데리고 곶자왈 내 평원으로 향했다. 키가 2미터에 달하는 말들이 사람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이동했다. “우린 말들이 달리는 모습만 봐왔지만, 사실 말들은 달리는 걸 싫어해요.” 김 대표는 말과 봉사자들의 교감을 위해 제한적으로 승마를 하겠지만 그 위에 안장을 얹지는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말의 체온은 사람과 비슷한 37도예요. 말을 그대로 안고 있으면 체온이 느껴져요.”

“인간과 교감하는 말들, 너무 몰랐어요”

가슴이 트이는 벌판에 도착하자 말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풀을 뜯기 시작했다. 얼마 전 거제에서 구조돼 아직 ‘왕따’를 당하고 있는 퇴역경주마 ‘파인 트럼펫’ 곁에 우두머리 말 ‘자이언트’가 다가갔다. “와~ 쟤네 봐요. 그루밍하네.” 말들이 서로에게 삶의 방식을 다시 나눠주는 것, 김 대표는 그것을 재야생화라고 했다. “이곳 드넓은 곶자왈은 원래 말들이 있던 곳이에요. 그곳에 제가 온 거죠. 전 도울 뿐이에요.”

제주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 김남훈 대표는 말들을 구조하고 보호하기 위해 마을 공동목장 68만 평을 임대했다. 김지숙 기자
제주 곶자왈 말구조보호센터 김남훈 대표는 말들을 구조하고 보호하기 위해 마을 공동목장 68만 평을 임대했다. 김지숙 기자

서울 서대문에서 사촌 동생과 행사에 참가한 박지수씨는 말들이 우리와 너무 닮았다고 했다. 박씨는 “말들의 임신 기간이 11개월이고, 체온이 비슷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말도 무리에서 고도의 사회 생활을 한다.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너무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13살 참가자 김민경 어린이는 말이 왜 좋냐는 물음에 단 한 마디로 답했다. “말은 교감하는 동물이니까.”

그 사이 말들은 구찌뽕, 쑥, 잡풀에 홀려 점점 더 사람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제주/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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