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국에서 체험동물원 대표의 강의를 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시 항의했고 이후 몇 시간도 안 되어 공지의 내용이 바뀌었다. 아마 방송국 측에서는 동물체험의 실태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방송국을 비난할 의도는 없었다. 핵심은 사람들에게 왜 체험동물원이 잘못인지를 알리는 데 있었다. 비슷한 사례는 전에도 있었다. 원숭이 쇼를 하는 업체가 전국 공연 투어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공연업체와 계약한 전시장에 항의했다. 국제회의도 개최하는 공기업에서 논란이 되는 업체와 재계약을 할 이유는 없었다. 동물을 이용해 돈을 버는 행위는 동물복지의 원칙에 위배된다. 그러나 업체는 그것을 통해 돈을 벌고 밥벌이를 한다. 그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한들 합의가 될 리가 없지 않나. 나의 전략은 차갑고 냉정하게 핵심을 던지며 대응한다는 것이다. 직접 부딪히면 감정싸움이 되고 대부분 본질을 흐리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동물이슈 중 왜 동물체험에 집중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동물을 때려죽이고 먹는 등 잔인한 학대는 더 많다. 사실 체험전을 시작할 때 상당한 수의 업체 주인들은 동물을 학대할 목적으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 동물을 좋아해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물의 숫자가 많아지고 돈을 벌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그야말로 초심을 잃게 된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상황에서 동물의 복지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물은 말을 못한다. 동물이 시름시름 아프다 죽었을 때 처음에는 당황하다 결국 그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동물들은 나를 왜 이렇게 대하느냐고 항의하지 못하지 않나.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 항의하지 않았어?”라고 할 것인가. 동물을 사랑하고 잘해주고 있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방적인 짝사랑의 관계가 보인다. 그런 부부 있지 않나. 남편은 늘 어디서든 아내의 자랑을 한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주변 사람 다 남편의 아내 사랑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어떨까. 아내 이야기를 하는 남편의 옆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 없이 웃고 있는 중년 아내의 그늘을 본 적 있는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미투 폭로가 잔혹한 학대를 당한 여성의 분노가 표출되는 것에 불과할까.
책상 위를 뒹굴거리며 놀아달라고 조르는 니체.
엉덩이로 은근슬쩍 마우스를 뭉개며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니체.
동물체험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면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인간이 하는 일방적인 사랑. 그리고 결과가 나쁘게 나왔을 때 하게 되는 비겁한 자기 합리화. “나는 동물을 사랑했는데 그냥 운이 안 좋았어” 혹은 “나는 아내를 사랑했는데 아내가 날 받아주지 않았어” 같은. 그리고 이어지는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어?” 왜 성추행당한 여성들이 참고 참다 나중에서야 폭로하냐고?
동물복지의 원칙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 그 이상이다. 아니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동물뿐 아니라 모든 타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혁명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동물복지에 대한 담론이 폭발하고 있다. 반드시 좋은 방향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직 모른다.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개혁이 잘 될 수 있을까. 동물복지란 좋고 아름다움을 말로 선언한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동물보호운동 하시는 분치고는 키우는 동물이 적네요?” 많이 듣는 말이다. 여태까지 개 두 마리, 햄스터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다. 고양이 한 분(!)의 마음 헤아리기도 힘든데 개, 고양이, 햄스터, 앵무새, 거북이, 기니피그…. 다양한 동물들 마음을 다 알고 건강도 살펴주고 돈도 벌겠다니.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 니체는 이제 집사의 자판을 가로막아도 마우스를 가지고 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니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마우스다. 아직 3년차 신혼(?)인데 우리 관계는 어떻게 발전해나갈까. 진짜 사랑은 만나면 만날수록 맛깔나다.
글·그림·사진 전채은 동물을 위한 행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