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듯한 학생이 밥을 먹는 길고양이의 등을 쓰다듬고 있다.
새벽 2시20분. 인적이 끊긴 아파트 단지 앞 인도 위. ‘삼선 슬리퍼’에 교복을 입은 학생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러고 있을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학생 손이 향하는 곳에 있는 카오스(흰색, 노란색, 검은색 등의 털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무늬의 고양이) 한마리가 보였다. 학생은 바닥에 앉아 있는 카오스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학생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카오스는 안면이 있는 길고양이였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크지 않아서 가끔 만나서 간식을 주는 사이였다. 중성화수술의 흔적으로 왼쪽 귀가 잘려 있어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아이로 보였다. 평소 나는 이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학생이 혹시 그 사람인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밥 주는 아이인가 봐요?” “아니요. 처음 보는데 자꾸 울어서 물 떠다 줬는데 안 먹네요.” 고양이를 돌보는 그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배가 고파서 그럴 거예요. 뭐 좀 먹고 나야 물을 먹을 거예요.” 사료 캔 하나를 까주면서 학생과 몇마디 주고받아보니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귀가 잘린 것은 중성화수술을 했다는 표시로 누군가 돌보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큰 고양이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서 태어난 동네에서 평생을 산다 등등.
그러다가 길에서 사는 고양이는 3~5년 정도밖에 못 산다는 말에 학생이 내게 묻는다. “집으로 데려가도요?” “아뇨, 집에 가면 15년 이상은 살죠.” “아~.” 표정은 못 봤지만 짧은 감탄사 끝에 묻어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길고양이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일하는 중인 내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빨리 다음 장소로 가야 했다. 오토바이를 올라타며 카오스가 캔을 다 먹으면 그릇 좀 치워달라는 부탁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꽃향기를 잔뜩 품은 어둠을 뚫고 가는데, 순간 울컥하며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 학생의 부모님에게. 학생에게 생명에 대한 편견 없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게 가르쳐주신 부모님에게 말이다. 아마도 그 덕분에 학생은 분명히 다른 생명에 대해 호감과 배려심이 있는 어른이 될 테니까. 그런 어른들이 많아지는 사회는 모두가 일부러 길 위의 생명을 돌보거나 지키는 일에 나서지 않아도 괜찮을 테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하연 길고양이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