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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총 맞고 떠난 ‘상암이’가 던지고 간 고민

등록 2018-10-04 18:14수정 2018-10-04 20:19

[애니멀피플]
조심성 많고 사교적이던 개 ‘상암이’의 죽음
정돈되지 않은 유기견 포획 방식 돌아봐야
생전의 상암이. 상암이를 돌보던 주민 전은정씨에 따르면 상암이는 “유순하고 놀기 좋아하는 개”였다. 송주희 제공
생전의 상암이. 상암이를 돌보던 주민 전은정씨에 따르면 상암이는 “유순하고 놀기 좋아하는 개”였다. 송주희 제공
놀기 좋아하고, 얽매이는 것은 싫어하는 친구였다. 장난기가 많았지만 그래도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다. 누가 밥을 줘도 상대방 기분 좋으라는 듯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이름은 상암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공원 인근에 가족없이 서식했던 황구 상암이는 9월28일 생을 마감했다.

월드컵공원 반려견 놀이터를 자주 찾던 시민들은 그를 늘 서성이던 개로 기억한다. 상암이는 이른바 ‘떠돌이개’였다. 누렁이라 불리다 언젠가부터 상암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반려인이 없는 상암이는 반려견 놀이터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려인들이 월드컵공원 인근을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상암이가 소리없이 다가와 있었다.

상암이는 조심성이 많은 개였다. 사람이 조금만 손을 뻗으려 하거나, 크게 이름을 부르면 오히려 머리를 쑥 집어넣고 뒷걸음질쳤다. 다른 개들과는 정말 잘 지냈다. 늘 소리없이 나타나 산책 나온 개들과 신나게 놀다가 사라지곤 했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송주희(37)씨는 지난 6월부터 상암이와 연을 쌓았다. 유기견 세 마리를 키우는 그는 산책 나가면 2~3번에 한번 꼴로 상암이를 만났다. 그가 보기에 “상암이는 이 동네를 자기 집이라고 여기는 개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으면서도 늘 사람과 거리를 두며 다녔다. 어느날은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했다.”

상암이가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 반려동물놀이터에서 송주희씨의 개들과 놀고 있다. 송주희 제공
상암이가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 반려동물놀이터에서 송주희씨의 개들과 놀고 있다. 송주희 제공
상암이는 송씨의 개들이 놀다가 짖어도 단 한번도 마주 짖거나 으르렁거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놀다가 늘 별 일 없었다는 듯 헤어지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귀갓길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송씨의 집 앞까지 쫓아왔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손짓했는데,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르면 이내 뒷걸음질쳐 몸을 피했다.

송씨는 “그 무렵부터, 이 친구를 꼭 구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사람들이 밥을 챙겨주는데도 살이 점점 빠지는 것이 건강 상태도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송씨는 “처음 만났을 때 봤던 배냇 털 같은 것이 가을께나 되어서야 다 빠졌고, 이빨이 깨끗한 걸로 보아 많이 봐야 1살 정도”라고 추정했다.

마포구 주민 전은정씨도 월드컵공원 반려견놀이터의 마스코트 같았던 상암이를 추억했다. 전씨는 상암이를 “천사 같은 애,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애였다”고 말했다. 그는 상암이가 공원에서 안전하게 잘 지내준다면 황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뀔 수 있겠다는 낙관까지 했다.

그러나 9월12일께 놀이터에 포획틀이 설치된 것을 보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상암이를 구조할 사람을 모집했다. 공원을 제 집 삼아 자유롭게 지내던 상암이가 동물보호소에 가면 황구라는 이유로 입양처를 찾기도 어려울테고, 그러다 잘못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구조 계획을 세웠다. 임시보호처를 마련하고, 병원에서 건강검진과 중성화 수술을 할 계획을 세우며 입양처도 수소문했다. 마침 경기도 일산에서 상암이와 함께 살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마취총을 맞고 쇼크사한 상암이의 마지막. 송주희 제공
마취총을 맞고 쇼크사한 상암이의 마지막. 송주희 제공
“추석 연휴가 지나면 구조하기로 했다. 연휴 기간 공원에 사람이 붐벼 문제가 될까봐 서부공원녹지사업소 관계자에게 미리 연락을 해뒀다. 우리가 구조해서 입양 보내겠다고.” 그런데 연휴 직후인 27일, 서부공원녹지사업소 쪽에서 마취총으로 포획할 수도 있다는 연락이 왔고, 손 쓸 틈 없이 28일, 상암이는 마취총을 맞고 생을 마쳤다.

올리브동물병원 박정윤 수의사는 “유기견 포획에서 사냥꾼이 등장하는 사례는 전례를 찾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전국의 유기견을 구조한 경험이 있지만, 개를 마취해서 포획한 경우는 개를 잡아먹는 개 딱 한 건이었다. 마취총 주사 바늘 자체만으로도, 13kg 정도로 추정되는 크기의 상암이는 죽을 수 있다. 어떤 경위로, 얼마만큼의 용량의 마취액이 쓰였는지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부공원녹지사업소 관계자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포획틀을 설치해 여러 차례 포획을 하려고 시도했는데, 잘 안됐다. 개를 왜 안 잡냐는 민원이 계속되다보니 엽사에게 의뢰해 마취총으로 포획하기로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마취액의 용량이나 쇼크사의 원인 등에 대해 사업소는 설명하지 않았다.

상암이의 죽음을 계기로 유기견 포획 시스템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유기견 포획 방식이 동물을 죽이는 방향이 아니라 살리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며, 생명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 있다. 월드컵공원 인근을 떠돌며 사람들과 관계를 쌓은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상암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누렁이 혹은 떠돌이개에 대한 인식부터 유기견 포획 방식까지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세상을 떠났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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