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옥 크리킨디센터장이 혁구를 쓰다듬고 있다. 김 센터장과 혁구는 서로 자리를 마주 보고 있는 직장 동료다. 신소윤 기자
혁구는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 매일 아침 9시 무렵 출근해 밤 9시경 퇴근하는 성실한 출근견이다.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을 제외하고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한 개근견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혁구는 서울혁신파크에서 떨어진 섬처럼 각자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던 2천 명가량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실로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애니멀피플’은 2일, 혁구의 동료이자 보호자 중 한 사람인 서울혁신파크 김희옥 크리킨디센터장을 만나 ‘출근견의 사회생활’에 대해 들었다.
혁구가 서울혁신파크에 출몰한 건 지난 봄이었다. 3~4월경 몸이 마르고 날렵한 흰털의 진도 믹스견이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목줄도, 이름표도 달지 않은 개는 가족이 없어 보였다. 사람을 보면 피했지만, 개를 보면 흥분해서 꼬리를 신나게 흔들었다. 그렇게 산책하는 개들과 신나게 놀다가 밤이 되면 사라지고 낮이면 다시 개들에게 인사를 하며 달려 나왔다.
그 무렵, 서울혁신파크 내에 청소년 진로 모델을 개발하고 실험하는 크리킨디센터(서울시립은평청소년미래진로센터)가 개관했다. 김희옥 센터장은 부임 후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서울혁신파크 내에 2천 명에 가까운 사회적 기업, 단체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데 구심점이 되는 커뮤니티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는 혁신파크 내를 부지런히 쏘다니는 흰 개였다. “제가 여기 온 해가 서울혁신파크가 생긴 지 4년이 된 해였어요. 입주한 사람들 모두 사회 혁신과 관련된 좋은 일을 하고 싶어 들어왔을 텐데, 지속가능성… 그러니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너무 바빴어요. 여기 모인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런데 흰 개 한 마리가 눈에 띄었어요. 저 개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든 산책하는 개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렇게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서울혁신센터 내 크리킨디센터 사무실에 마련된 혁구 자리. 출근해서 대부분 잠을 자고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신소윤 기자
흰둥이, 혁신견, 피타, 엄근진, 초복이, 말복이…. 이름을 얻기 전 혁구를 사람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불렀다. 이름에 내재한 의미는 제각각이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혁구를 서울혁신파크의 마스코트처럼 여기며 좋아했다. 사람들은 ‘저 개는 도대체 뭘까’ 생각하면서도, 마치 원래부터 혁신파크에 있었던 개처럼 여겼다. 밥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개와 함께 산책 나온 반려인들을 간식을 챙겨주기도 했다.
그렇게 6개월 남짓 누구의 개도 아니지만 모두의 개로 살던 혁구에게 위기가 닥쳤다. 지난 10월, 한 주민이 혁구를 유기·유실견이라며 소방서에 신고했다.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뜰채로 혁구를 잡았다. 마침 그날은 서울혁신파크 내 사람들 가운데 50명이 모여 ‘혁신견을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혁구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논의하기로 한 바로 하루 전이었다. 유기견보호소에 가게 된 혁구는 입양 공고 시한이 지나면 안락사를 당한다고 했다. 몇몇 사람들이 쫓아가 혁구를 데려 나왔다.
산책은 혁구가 일과 시간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혁구는 산책하러 오는 돌보미들의 발소리도 기억한다. 허정민 제공
1살 혁구와 10살 몰티즈 방글이. 허정민 제공
사람들은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혁구를 둘러싸고 제 역할을 찾아냈다. 모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보호자로 나서 동물 등록을 했다. 누군가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혁구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내용을 공유하니, 누구는 혁구에게 적합한 사료를 추천했다. 누구는 점심시간을 쪼개 혁구를 산책시키러 나왔다. 병원비, 사료비 등은 십시일반 모았다. 일종의 공동 육아인 셈이다. 50명이 모인 오픈 채팅방에는 ‘오늘의 혁구’라는 구글 스프레드시트가 공유된다. 누가, 언제 산책을 시켰는지, 병원 검진 때 무슨 진단을 받았는지 등이 적혀 있다. 혁구를 돌보는 멤버가 추가되거나 바뀌어도 누구든 혁구의 건강 상태와 일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지다.
혁구는 사람들의 예측보다 나이가 어린 개였다. “병원에서 검진해보니 1살밖에 안 된 아이였어요. 그 전엔 행색이 좀 추레하고, 나이 든 개 같았어요. 그래서 길 생활에 노하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밤마다 되게 무서워하면서 잤을 것 같아요. 주로 산이나 공사장 칸막이 사이에서 지냈나 봐요. 여기 사무실에 들어오고서 얼굴도 좀 좋아지고 살도 붙으면서 이제 오히려 좀 아기 얼굴 같은 느낌이 들어요.” 김희옥 센터장이 말했다.
출근견이 된 것은 11월 중순 갑작스러운 한파가 들이닥친 것이 계기였다. 혁구는 낮에 크리킨디센터 사무실에서 주로 지내고, 밤이 되면 보안시스템 때문에 사무실 밖 계단에서 잠을 잤다. 처지를 딱하게 여긴 사람들이 의견을 모았고, 서울혁신센터 인근에 사는 주민인 허정민씨가 혁구에게 잠자는 공간을 제공하기로 했다. 다행히 허씨의 반려견인 10살 몰티즈 ‘방글이’가 낯선 손님인 혁구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혁구는 허씨의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 9시경 센터에 출근해서, 허씨가 일을 마치고 다시 동네로 돌아오는 시간인 밤 9시경 퇴근한다. 낮에는 주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점심과 늦은 오후에도 센터 내 시간이 되는 누군가와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산책을 한다.
크리킨디센터 대안학교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혁구. 요즘은 겨울방학이라 혁구가 심심해한다. 김희옥 제공
혁구가 지내는 크리킨디센터는 오래전 정부 산하 기관의 동물실험실이 있던 자리였다. 김 센터장은 “동물실험실이라는 집약적인 장소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온 도시가 동물에게는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몇십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개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산으로 놀러 가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우리가 도시를 만들어서 얘네가 살 데가 없어진 거잖아요. 산책하다가 혁구를 보고 ‘어, 너 예뻐졌다 말복아!’라고 인사하는 사람을 만났어요. 개를 좋아하는 방식이 여러 모습으로 우리 역사 안에 있다고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쓰는 시대니, 혁구를 계기로 인간과 도시의 동물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