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피플] 기고/김영환 동물법비교연구회 연구원
유기견 보호소의 개들. 게티이미지뱅크
동물권단체 케어의 박소연 대표가 구조한 동물 수백마리를 몰래 안락사시킨 사실이 드러나며 각종 논란들이 점화되고 있습니다. ‘애피’는 이번 케어 사태가 박 대표 개인의 법적, 도덕적 해이 논란에서 더 나아가 우리사회가 직면한 유기견, 개농장 등 동물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철학적 고민을 나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물들과 가까이에서 일하고 고민하는 분들의 다양한 의견이 담긴 글들을 싣습니다.
바로가기▶ 기고/지금 ‘안락사 논쟁’을 할 때인가
많은 생명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은 상황에 놓여 있다 동물보호운동 내부에도 이런 다양한 단절과 충돌이 있다. 채식을 둘러싼 단절을 흔히 본다. 동물보호운동가가 아니지만 비건인 사람도 많고 동물보호단체의 대표이면서도 비건이 아닌 사람도 있다. 가장 유명한 충돌은 생명 그 자체가 과연 가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을 둘러싼 충돌이다. 죽는 것보다 나은 삶을 살다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안 태어나는 것보다 바람직하다는 생각과 그것에 반대하는 생각 간의 충돌이다. 전자의 생각에 따르면 안락사나 살처분도 정당할 수 있다. 영국의 농장동물복지위원회는 ‘삶의 질’이란 타이틀 아래 ‘살 가치가 있는 삶’, ‘살 가치가 없는 삶’ 같은 개념을 사용하면서 모든 농장 동물이 ‘살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관점을 표명하고 있는데, 이는 부정적 경험이 긍정적 경험보다 더 많다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철학에서는 이것을 공리주의라고 부른다)을 전제한 것이다. 이 틀을 가지고 현실을 보면 무수히 많은 생명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은 상황에 놓여 있다. 만약 긍정적 경험이 부정적 경험보다 더 많도록 이들의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없다면 이들은 죽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다. 생명은 긍정적 경험의 전제로서의 가치만을 가진다고 보는 이런 관점은 생명은 존엄하다는 클리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거북한 이야기이지만 지금까지 어떤 학자도 이보다 더 나은 생명관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동물보호운동의 주류가 생명을 대하는 태도이다. 만약 생명 그 자체가 가치 있다는 관념을 고수하였다면 수많은 가축이 매일 도축되는 현실에서 동물보호운동은 시작조차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의 생명관은, 생명은 긍정적 경험의 전제로서의 가치만을 가진다는 관점과 다르지만, 필자의 관점이 이 관점보다 더 설득력이 크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_______
살처분으로 끝날지언정 안락사나 살처분을 이처럼 인정한다면 그것을 직접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식용 목적으로 개를 사육하는 곳에서 개를 구출한 후 지자체 동물보호센터에 보내면 이십일 후에 안락사당할 수 있으므로 일단 내가 기르다가 나중에 못 기르겠으면 직접 안락사를 시키겠다고 하는 발상도 가능하다. 단 며칠이라도 더 살게 하려고,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에 있게 하려고, 죽을 때 덜 고통스럽게 하려고, 개농장에서 구출하겠다는 발상이 이상한가? 아픈 가족을 떠나 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안다. 마지막 순간에 하루라도 그 사람이, 그 개가, 그 고양이가 더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얼음을 핥으며 추위에 떨어도, 대변 옆에서 태어나 뜬장 위에서 살아가는 개농장에 비하면 얼마나 천국인가? 좁디좁은 케이지 안에 휴지처럼 구겨 들어가 이동된 후, 전기봉으로, 쇠파이프로,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자신을 돌보던 사람 손에 약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얼마나 나은 죽음인가? ‘결국 죽일 것을 왜 구조하는가’하는 이야기는 이런 차이를 무시한 이야기다.
유기견 보호소의 개들. 게티이미지뱅크
안락사나 살처분은 노선의 문제 개농장과 유기견의 현실에 대해 잘 아는 동물보호운동가의 경우도 안락사나 살처분에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안락사나 살처분은 노선의 문제다. 동물보호운동의 발전을 원한다면 분노를 머금되 안락사나 살처분에 반대하는 논증의 형식을 띠어야 한다. “어떤 생명은 덜 중요하다는 생각, 이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케어 대표 사퇴를 위한 직원연대 성명서)라는 이야기나 “이들을 다 데려다 죽이자고 하면서 생명의 존귀함을 설득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동물권행동 카라와 동물자유연대 공동성명서)와 같은 이야기들은 감당하기 힘든 생명은 구조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노선과 맞지도 않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논점을 흐리는 이야기이다. 결국 개농장과 유기견의 문제다. 민간단체가 어떤 노선을 취하든 개농장과 유기견의 규모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개농장과 유기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힘을 내어야 한다. 그리고 동물단체들은 더 협력하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아주 조금이라도 진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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