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피플] 기고/김기왕 부산대 교수
이제 동물권 운동에서, 죽음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지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되었다. 클립아트코리아
동물권단체 케어의 박소연 대표가 구조한 동물 수백마리를 몰래 안락사시킨 사실이 드러나며 각종 논란들이 점화되고 있습니다. ‘애피’는 이번 케어 사태가 박 대표 개인의 법적, 도덕적 해이 논란에서 더 나아가 우리사회가 직면한 유기견, 개농장 등 동물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철학적 고민을 나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물들과 가까이에서 일하고 고민하는 분들의 다양한 의견이 담긴 글들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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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영된’ 슬픔이 아닌 진짜 슬픔을 말해야 동물권 운동 내에는 언젠가 충돌이 불가피한 상이한 주의 주장들이 침묵 속에 공존하고 있다. 생태주의와 개체주의의 공존이 하나의 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죽음의 배제를 중시하는 입장과 고통의 배제를 중시하는 입장, 줄여 말하자면 생명 중심의 관점과 무고통(無苦痛) 중심 관점의 충돌이 표면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 문제는 이제 공론화를 통해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되었다. 현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 동물권 운동 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동물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동물들도 죽음을 두려워할까? 물론 동물들도 생존 본능이 있다. 먹이를 찾고 유해 자극을 회피하는 행동을 능숙하게 해 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통증과 분리된 죽음 자체, 즉 자아의 종결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이 성립되려면 우선 자아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하고 유한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자신이 사라질 것이란 생각을 가져야 한다. 전자는 몇몇 동물에게서 확인되고 있는 듯하나 양화(量化)된 시간의 개념이나 연역적, 귀납적 추리를 통한 죽음의 필연성을 비인간 동물이 소유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점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하려는 생각은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동물에게 죽음을 인지할 아무런 단서를 전달하지 않고 고통 없이 목숨을 끊으면 어떨까?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으나, 고통의 총량은 제로(0)일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인지하지도, 통증을 느끼지도 못한 채 죽은 동물에 대해 슬픔을 느낀다면 이는 인간에 의해 동물에게 투영된 슬픔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동물 입장에서 동물권 문제를 말하고자 한다면, 투영된 슬픔에 휘둘리지 말고 그들의 진짜 슬픔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 인간도 현재를 살고 있을 뿐이다. 과거, 미래 그리고 이를 아우른 “시간”이라는 것은 모두 인간의 사유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다. 지금껏 동물 문제를 다룰 때마다 이처럼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한 채 동물에게는 실존하지 않는 문제를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의인화(擬人化)의 맥락에서 자주 등장한다. 일례로, 젖소는 인간의 손으로 강제 임신이 되어 우유를 생산하는데 이를 마치 인간 사이의 성폭행과 같은 치욕적인 일로 묘사하는 동물권 단체의 홍보를 종종 본다. 하지만 축산동물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수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암소에게서 유해자극에 대한 회피는 보여도 그들이 인간 여성과 같은 수치감을 느낀다는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어떤 이는 비록 비유가 잘못되었더라도 동물 보호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비유가 동물권 운동의 합리적 판단을 방해한다면 이는 문제다. 더구나 이런 비합리적 맥락에서 진짜 문제는 묻혀 버리고 가짜 문제가 진짜 문제로 둔갑한다면 이는 중대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고통 없는 죽음이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이며 동물의 고통 없는 죽음을 인간의 기준으로 거론하는 하는 것은 가짜 문제를 붙잡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제 동물권 운동에서, 죽음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지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되었다. 이 점에서 안락사는 동물권 운동에서 피할 수 없는 논제라 할 것이다. 어제까지는 시기상조였는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이제는 공론화가 필요하게 되어 버렸다. 미래에 전개할 논의를 앞당겨 한 김에 덧붙여 말하자면, 안락사는 사실 단지 동물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의 과정은 소설이나 연속극에 나오는 낭만적인 과정이 아니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허상에 기초한 윤리에 매달려 안락사 불허 입장을 계속 지켜간다면 여러분들이 죽을 때도 짧게는 수 시간, 길게는 수 개월의 극심한 고통을 치러야만 여러분은 생애 최악의 고통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는 그저 다른 종(種)의 이야기로 남겨 둘 사안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_______
생명 중심에서 무고통 중심으로 나는 장래에 동물권 운동이 생명 중심에서 무고통 중심으로 방향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안락사도 사안에 따라 시행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만약 진작에 이런 논의가 동물권 운동 내부에서 광범위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었다면 박소연 대표는 어떤 때 안락사를 할 것인지 미리 말할 수 있었을 것이고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동물권 운동의 최대 위기라 느껴지는 작금의 사태도 없었을 것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락사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고, 박소연 대표의 행동은 용인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는 동물권 운동 바깥에 있는 대중들과 함께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실체적 진실이 보다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 말씀드리고 싶다. 만약 박소연 대표의 행동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대중은 동물권 운동에 대해 분명한 불신의 눈길을 보내게 될 것이고 우리는 앞으로 오래도록, 짊어지지 않아도 될 불신의 짐을 진 채 힘든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이다. 이는 후원금 얼마가 줄어드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실질적 악영향을 동물권 운동 전체에 미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누군가의 명백한 부정에 의한 후과라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겠지만 뭔가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이제 막 조그만 발언권을 얻게 된 동물권 운동이 짊어져야 할 짐과 그로 인한 우회의 과정은 너무나도 무겁고 억울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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