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게 웃는 권나영씨(왼쪽 아래), 정주희 감독(위), 김희주 감독.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어느 골목길. 누군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며 고양이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그의 목소리가 퍼지자 하나 둘 모여드는 길고양이들. “맘마 먹으러 왔어?” 가방 속 사료와 간식을 꺼내 빈 그릇을 채우고, 나뭇잎이 떠다니는 물그릇을 비운 뒤 따뜻한 물을 섞어 챙겨온 생수를 채운다.
권나영씨는 미아동 길고양이를 책임지는 캣맘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마세요’는 그와 길고양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 권씨와 그의 이야기를 영화에 담은 김희주, 정주희 감독을 지난 1월16일 미아동 한 고양이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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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에서 시작된 긴 인연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권나영씨가 캣맘이 된 건 약 4년 전이다. 언어장애와 뇌병변장애를 지닌 그는 일주일에 세번 병원에서 투석을 받아야 한다. 병원을 가기 위해 나선 그의 집 앞에 작은 새끼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권나영씨가 고양이 카페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다.
고양이에게 무엇을 줘야하는지, 주식(사료)과 간식의 차이는 무엇인지, 지금의 나영씨에게 너무 당연한 지식들을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병원을 갔다 온 후에도 같은 자리에서 울고 있더라고요. 안쓰러워서 집에 있던 소시지를 줬어요.”
권씨의 걱정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양이는 소시지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날부터 권씨는 그 고양이의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나날이 쑥쑥 자라는 고양이를 보니 행복하더라고요.”
그러다 가입하게 된 페이스북 길고양이 커뮤니티에서 길고양이들의 현실을 알게 됐다. 하루에도 수십개씩 고양이 구조와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다. 그 글들은 그가 캣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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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새벽길을 나서는 이유
길고양이와 처음 인연을 맺을 때처럼 나영씨는 고양이 밥그릇이 깨끗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할 때 가장 행복하다. 그에게 밥이란 고양이와 사람의 공생을 증명하는 상징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가방엔 언제나 고양이 사료와 간식들이 있다. “요즘은 가끔 비둘기들한테도 사료를 주곤 해요” 나영씨가 웃으며 말했다.
권나영씨의 가방엔 늘 고양이 사료와 간식이 들어있다.
권나영씨가 발견한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는 쪽지.
미아의 길고양이들은 이제 권나영씨의 목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지만 그는 주로 새벽에 집을 나선다. 밥을 주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서다. “내가 힘든 건 괜찮으니 애들 밥그릇만 안 치웠으면 좋겠다”는 게 권씨의 바람이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간혹 밥그릇을 치우거나 악담을 퍼붓기도 한다.
“한 번은 고양이들은 다 죽여야 한다라는 말을 한 할머니가 있었어요. 할머니도 오래 사셨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시냐며 반격을 가했죠.” 나영씨는 사람의 과한 욕심으로 많아진 동물들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밥과 물만이라도 제때 먹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그는 부모님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서울 곳곳에서 열리는 여러 동물권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활발한 커뮤니티 활동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중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종종 있다. 집회 참가자가 그의 기대만큼 많지 않아 아쉽지만, 대신 미아동 이웃들을 설득해 함께 나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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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부자였음 좋겠어요”
길고양이와의 만남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길에서의 삶은 때론 치열하고 위태롭다. 권씨는 아픈 고양이들을 볼 때 마음이 가장 무겁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모든 아이들을 다 구조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권나영씨와 정주희(왼쪽 앞), 김희주 감독.
“최근 구조한 ‘꽃꽂이’와 같이 사람을 좋아해 따라다니다 술 취한 사람에게 학대를 받는 아이들이 많아요.” 지금까지 그가 구조 후 입양을 보낸 고양이들만 10마리가 넘는다. 하지만 나영씨 홀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이런 권씨의 상황을 알고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 동물 병원 및 쉼터, 동료 캣맘, 캣대디들, 그리고 익명의 후원자들은 여러 경로로 그에게 도움을 준다. “항상 고맙지만 도움만 받아 미안한 마음이에요.”
그런 권씨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다.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다면 더 많은 고양이들을 도울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해요.”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벼락부자가 되면 큰 집을 지어 불쌍한 애들을 다 데려와야지”라는 꿈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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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조 도둑처럼 새벽 촬영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15학번 동기인 김희주, 정주희 감독은 페이스북 커뮤니티 ‘길고양이 친구들’에서 권씨를 알게 됐다. 처음 권나영씨와 연락했던 정주희 감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오던, 맞춤법이 맞지 않던 게시글이 눈에 계속 맴돌아”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권나영씨를 촬영하는 김희주 감독과 권씨의 말을 듣고 있는 정주희 감독.
두 감독은 사람들과의 마찰을 피해 주로 새벽에 촬영했다. 경계가 심한 고양이들을 배려해 마치 3인조 도둑 마냥 조심조심 촬영을 진행했다. 그렇게 9월부터 11월까지 총 12회차의 촬영본으로 1차 편집본을 제작했다. 지난 12월, 동국대학교 영화제인 ‘동국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됐다. 영화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들었지만 두 감독은 추가 촬영을 결정했다.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과 나영씨의 진심을 더 잘 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추가 촬영에 필요한 제작비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아보기로 했다. 지난 1월13일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마세요>’라는 프로젝트를 열었다. 게시 3일만에 목표금액 150만원을 돌파했다.펀딩은2월까지계속이어진다.
정주희 감독은 “이 다큐는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당연한 이치를 우리는 놓치고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다고 지나치고 모른척했던 것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영은 교육연수생 cye422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