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들은 푹신한 낙엽 더미에 철퍽 주저 앉아 한가로이 나무 열매를 주워 먹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가슴에 새겨진 하얀 부메랑 무늬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10월31일 전남 구례군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이 관리하는 반달가슴곰 자연 적응 훈련장에 있는 다섯마리 곰 가운데 세 마리가 모여 먹이를 먹고 있었다.
이날 현재 자연적응훈련장에는 RF-65, RM-66·67·68·69 등 다섯 마리 곰들이 머물고 있었다. 이들 다섯 마리는 지리산 반달가슴곰의 유전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지난 가을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곰들은 우수리아종으로 러시아, 중국, 한반도 등지에 분포하며 지리산 반달가슴곰과 개체 유전자 분석 결과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은 지리산 야생 적응 훈련을 마친 곰들이 진짜 야생으로 방사되는 날이었다.
야생으로 발을 내딛다
31일 오후 1시께 자연 적응 훈련장 앞에는 종복원기술원 직원들이 환경부에서 행정 절차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행사는 조촐했다. 곰들이 사는 자연 적응 훈련장 문을 열면 끝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반달가슴곰들이 지리산에 있는 종복원기술원 자연 적응 훈련장에서 먹이를 먹고 있다. 윤주옥 제공
문을 연다고 곰들이 우르르 나오는 건 아니다. 5500㎡(약 1600평) 넓이의 훈련장에 있는 곰들은 문이 열린 줄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종복원기술원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몇몇은 노란 고무탄이 든 서바이벌건을 들고 몇몇은 먹이를 챙겨 문 앞에 섰다. 서바이벌건은 곰에게 직접 쏘는 것은 아니고, 곰이 사람을 보고 위협적인 행동을 할 경우를 대비해 큰 소리를 내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야생의 반달가슴곰은 사람을 피하는 습성이 있다. 만일을 대비해 자연 적응 훈련장에 있는 동안 곰들은 대인 기피 훈련을 받기도 했다. 종복원기술원 직원들은 자연 적응 훈련장에 들어갈 때마다 꽹과리를 치는 등 큰 소리를 냈다. 그러면 곰들은 나무를 타고 후다닥 도망을 가곤 했다. 곰들에게 사람을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존재로 인식시킨 것이다.
방사된 곰이 자연 적응 훈련장 문 밖을 빠져나가 야생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센서 카메라에 포착됐다. 종복원기술원
오후 2시 무렵 드디어 훈련장 문이 열렸다. 종복원기술원 직원들이 문 앞으로 꽁치와 밤 따위를 줄줄이 놓았다. 먹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길 유도하기 위해서다. 울타리 밖으로 나온 곰들은 나무 열매가 가장 풍성한 이 계절, 부지런히 먹이 활동을 한 뒤 동면할 곳을 찾아야 한다.
문광선 종복원기술원 남부센터장은 “곰의 활동 반경이 크긴 하지만 나오자마자 갑자기 멀리 가진 않을 테고 노고단 아래, 화엄사 계곡 등지에서 동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반달가슴곰들은 나무굴을 좋아하지만 지리산에는 나무굴이 많지 않아 바위굴이나 조릿대밭, 혹은 바위를 등지고 노천에서도 동면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엄마 잃은 고아곰들
지리산에 더 깊고 넓게 스며들게 될 이 곰들은 올 봄 러시아 연해주에서 엄마를 잃은 곰이다. 올해 1월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곰들은 아직 몸무게 20kg에 불과한 어린 개체들이다.(곰이 다 성장하면 수컷은 120kg, 암컷은 70kg에 이른다) 아직 곰 사냥이 합법적인 러시아에서는 5, 6월이 되면 사냥 시즌이 끝나 고아곰들이 남는다. 종복원기술원은 지리산 반달가슴곰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해마다 6마리 곰을 도입하기로 러시아와 계약했다.
또 다른 곰이 바깥을 탐색하며 문 밖을 나서고 있다. 종복원기술원
지리산에는 60마리에 가까운 반달가슴곰이 살지만 짝짓기에 참여하는 개체는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송동주 종복원기술원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2018년 7월 현재) 수컷 4마리, 암컷 5마리만 새끼를 낳고 있다”고 밝혔다. 문광선 센터장은 “영역을 지배하는 암컷들만 짝짓기를 하는데다 암컷들이 선택하는 수컷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전적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근친 교배로 인해 약한 개체가 태어나거나 전염병이 퍼졌을 때 전멸할 가능성이 커진다.
“부디 사람 곁에 오지 말아라”
곰들은 이날 오후 4시부터 시작해 다음날 오후 4시까지 순차적으로 모두 문 밖으로 나갔다. 같은 시각 종복원기술원에는 최근 먹이를 찾아 사람 뒤를 쫓다 회수된 만 1살짜리 곰 RM-62가 좁은 철창에 갇혀 있었다. 사람과 곰이 사람 음식을 나눠 먹는 건 야생과 공존하는 방식이 아니다.
RM-62을 염두에 뒀기 때문인지 이날 동행한 윤주옥 반달곰친구들 이사는 곰이 있는 곳 먼 발치에 서서 몇 번이나 "부디 사람 곁에 오지 말고, 야생에 잘 적응하라"고 말했다. 문광선 센터장 또한 이제 우리가 야생의 곰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당부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RM-62의 경우 사람들이 먹이를 줬을 수도 있지만 버려진 먹이를 먹다가 사람들을 쫓게된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방사된 곰들이 잘 살아가려면) ‘우리 지리산’에 가는 게 아니라, ‘곰이 살고 있는 지리산’에 간다고 생각하셔야 한다. 야생을 길들이려하지 말고 사람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야생을 인정하고 더불어 사는 방법이다.”
구례/신소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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