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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산인들 못 넘으랴…원주, ‘의료기기’로 의기투합

등록 2021-09-02 04:59수정 2021-09-02 08:58

‘희망씨, 지역에서 만나다’ 강원 원주 혁신사례
대학·지자체·기업 합심…‘의료기기산업’ 싹 틔워
산단 입주기업 161곳 연매출 7000억원대 성장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첨단의료기기산업단지에 있는 메디아나 공장에서 직원들이 환자감시장치와 심장충격기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첨단의료기기산업단지에 있는 메디아나 공장에서 직원들이 환자감시장치와 심장충격기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

“흥업면 보건지소 단칸방에서 출발한 원주 의료기기산업이 불과 20여년 만에 연간 매출액 7천억원이 넘는 규모로 성장해 지금은 원주를 먹여 살리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18일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첨단의료기기산업단지 공장에서 만난 강동원(49) ㈜메디아나 사장은 “창업할 때만 해도 국산 전자의료기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 수입해서 썼고, 가격도 비쌌다”며 “의료기기산업은 수입대체 효과가 클 뿐 아니라 수출 전망도 밝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이 업체가 만든 환자감시장치와 심장충격기는 서울의 대학병원들과 서울지하철 등 국내뿐 아니라 미국 하버드대학병원을 비롯한 세계 유명 대학병원 등에 54만대 이상 판매됐다. 1993년 설립돼 중증환자의 혈압·맥박·호흡수·심전도 등을 체크하는 환자감시장치와 멈춘 심장을 되살리는 심장충격기 분야 대표 기업으로 성장해온 과정은 군사도시였던 원주가 의료기기산업도시로 발돋움한 역사와도 보조를 맞춘다. “원주 의료기기산업은 지역 대학과 지자체, 기업 등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자생적인 노력’의 결과로 시작됐”(강 사장)고 이후 중앙정부의 지원이 결합하면서 상승효과를 거둔 사례이기 때문이다.

원주 기업도시에 2013년 들어선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 전경. 센터에는 60여개 의료기기 업체와 지원육성기관인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등이 입주해 있다.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제공
원주 기업도시에 2013년 들어선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 전경. 센터에는 60여개 의료기기 업체와 지원육성기관인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등이 입주해 있다.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제공

■ 군사도시가 의료기기산업 대표 도시로

강원도내 의료기기 관련 기업(2019년 기준)은 161곳(전국 대비 4.5%)이며, 생산액은 7031억원(9.6%), 직원 수는 4903명(7.6%)이다. 경기도와 서울에 이어 고용 기준 전국 3위이며, 생산액 기준으로는 4위다. 강원도 의료기기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게 원주다. 김도진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주임연구원은 “강원도내 의료기기기업 가운데 90% 이상이 원주에 있다”고 설명했다.

원주는 20여년 전만 해도 의료기기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1979년 연세대 미래캠퍼스가 국내 처음으로 의용공학 전공을 개설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지역은 날로 위축됐고, 대학도 학생 수 감소를 걱정할 처지였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원주는 의료기기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점찍었다.

김광수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원장이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에서 가정용 의료기기 제품을 시연하는 모습.
김광수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원장이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에서 가정용 의료기기 제품을 시연하는 모습.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1997년 통상산업부가 주관한 테크노파크 선정사업(의료전자기술연구집단화단지사업)에 신청했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다.

시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탈락한 이듬해 자체 예산을 투입해 창업보육센터를 설립했다. 멀리 보며 인프라를 까는 데 힘을 쏟은 것이다. 입주 공간을 갖춘 창업보육공간이 생기면서 ‘실험실 창업’에서 ‘지역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원주시가 의료기기산업 지원조직으로 만든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초대 소장을 지낸 이성철씨는 “말이 창업보육센터였지 시설은 정말 열악했다. 초기에는 정부 지원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어쨌든 의료기기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원주에서 새로운 싹을 틔운 셈”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는 이후 기술 창업 기업이 이주할 수 있는 생산기반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1999년 태장농공단지 안에 별도 공간을 만들어 의료기기 업체를 입주시켰다. 2003년에는 문막읍 동화리에 220억원을 투입해 33만㎡ 규모 국내 첫 의료기기 전용공단을 건설했고, 의료기기 기업들 지원 거점기관인 첨단의료기기테크노타워(현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를 설립했다.

의료기기산업 활성화로 기업 설립과 유입이 늘어나자 원주시는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홍순필 원주시청 의료기기융합담당은 “2000년도만 해도 원주의 제조업체 가운데 의료기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2%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8%까지 성장했다. 원주가 강원도에서 인구가 가장 큰 폭으로 늘었는데 의료기기산업이 유지하고 확대하는 고용 등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원주 인구는 의료기기산업이 태동한 1998년 26만355명에서 7월 말 현재 35만5432명으로 9만여명 늘었다. 강원도청 소재지인 춘천이 같은 기간 24만4076명에서 28만2592명으로 소폭 증가하고, 관광을 빼면 별다른 산업기반이 없는 강릉은 22만9449명에서 21만2957명으로 줄어든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약진이다.

이규용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고용영향평가센터 소장)은 “원주 의료기기산업은 사업 태동 초기 대학과 지자체, 기업이 의기투합해 기술혁신과 산업집적을 이루고 그 결과로 지역의 생산과 고용 측면에서도 성과를 거둔 주목할 만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원주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에 입주해 있는 메쥬 박정환 대표(왼쪽)가 심전도 패치 작동 방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원주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에 입주해 있는 메쥬 박정환 대표(왼쪽)가 심전도 패치 작동 방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 원주 의료기기, 디지털헬스케어 시대에 주목

원주의 의료기기산업은 디지털헬스케어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에 입주한 심전도 실시간 모니터링 기업 ㈜메쥬(MEZOO)가 대표적이다. 신용카드 절반 크기의 패치를 가슴에 붙이기만 하면 병원에 심전도와 심장박동 등 생체신호가 전송된다. 박정환 대표는 “심장에 이상을 느껴 큰 병원에 가면 검사받기 위해 4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는 실시간으로 의료·건강관리 서비스를 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프시맨틱스(개인건강기록 기반 디지털헬스기술 개발), 휴레이포지티브(생애주기별 만성질환 건강관리시스템), 인프라큐브(건강관리를 위한 운동 도움 시스템) 등도 디지털헬스케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원주는 2019년 7월 전국 최초의 ‘디지털헬스케어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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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 인력 확보, 공간 확장 등 과제도

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전문성을 갖춘 인력 확보다.

근골격계 치료기를 주로 생산하는 ㈜윈백고이스트 김남혁 대표는 “(수도권으로) 회사를 이전해야 하느냐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을 정도로 원주의 짜임새 있는 지원체계는 마음에 쏙 든다. 그러나 연구나 해외영업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오죽하면 숙소 제공까지 내걸고 해외영업 인력을 채용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창업하거나 이전해 오려는 기업을 위한 공간 부족도 심각한 문제다. 그동안 원주시는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와 동화의료기기생산공장, 의료기기산업기술단지 등을 잇달아 조성했지만 이미 입주율 100%로 포화상태다. 영남지역에서 7년째 의료기기 업체를 운영 중인 김아무개(44) 대표는 “원주는 창업보육뿐 아니라 시제품 제작과 시험인증, 해외시장 진출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종합적인 기업지원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원주 이전을 검토하고 있지만 자리가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광수 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원장은 “30여개 기업이 입주할 수 있는 디지털헬스케어산업지원센터 건립 등 공간 확충이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한겨레>와 함께 현장을 찾은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은 “원주는 지역 대학과 지자체의 적극적 협력 아래, 지역 대학 인재들이 만든 의료기기 창업 기업들이 성장하고, 동시에 서울 등지에 있던 같은 업종 기업들이 ‘한 웅덩이’에 모여들어 생태계를 이룬 사례”라며 “중앙정부 대규모 지원이나 눈에 띄는 대기업이 없는 상황에서도 지역의 자원에 기반을 둔 특화 산업을 키워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들이 참조할 만하다”고 말했다.

글·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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