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국민의당 지난달 5일 청주에서 시민 등과 충청권 광역철도 청주 도심 통과 추진 약속을 했다. 청주도심통과 광역철도 쟁취 범시민비상대책위원회 제공
대통령 선거판이 달아오르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후보, 정당 등에 대선 공약 줄 대기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당분간 을’인 후보들에게 숙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지역공약을 들이밀고 있는데, 철도·공항·도로·터널 건설 등 토목형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이 주를 이룬다. 타당성 검증 없는 ‘무대포’ 공약도 수두룩하지만, 유권자를 등에 업은 자치단체들은 적극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공약 개발과 제안에 나선다.
서울·경기 등을 뺀 지방자치단체들이 후보 등에게 제안한 공약 500여건 사업비는 한해 정부 예산과 맞먹는 600조원 안팎이다. 헛공약으로 전락할 우려와 함께, 수도권 초집중과 지방소멸을 막고 지역균형발전을 끌어내기 위한 지방의 몸부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충북지역을 찾는 여야 대선 후보에겐 ‘통과의례’가 있다. 충청권 광역철도의 청주 도심 통과 추진 약속이다. 지난달 21일 청주를 찾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이어, 같은 달 30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협약했다. 지난 1일과 5일 김동연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같은 약속을 했다. 유철웅 ‘청주도심 광역철도 비대위’ 공동대표는 “지역 숙원사업 성공을 위해 후보에게 유권자인 도민의 이름으로 확약을 받아, 당선됐을 때 실행력을 담보하려고 협약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청주 도심 통과 광역철도 구축은 충북도가 20대 대선 후보들에게 건넨 대선 공약이다. 지난 8일 국민의힘 대전·세종·충남·충북도당이 윤 후보에게 건넨 97개 충청권 공약에도 포함됐다. 대전~세종에 이어 충북을 잇는 충청권 광역철도 청주 구간에 지하철을 놓는 게 핵심이다. 예산은 3조4904억원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달 21일 청주에서 시민 등과 충청권 광역철도 청주 도심 통과 추진 약속을 했다. 청주도심통과 광역철도 쟁취 범시민비상대책위원회 제공
이 사업은 지난 6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4차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에서 빠졌다. 지난해 서울과학기술대가 진행한 비용대비 편익(B/C) 분석에서도 0.87로 경제성이 부족한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충북도와 시민사회단체 등이 반발하자 국토부는 ‘경제성 등을 다시 고려해 검토·추진한다’고 여지를 남겼다. 엄태석 서원대 공공서비스대학 교수는 “대선 후보는 중앙의 큰 이슈·공약 등은 차별성을 두려 하지만 지역 공약은 표 쏠림을 의식해 거절하지 못하고 웬만하면 수용하려 한다. 실현 가능성 등은 당선 뒤 문제로 본다. 이 때문에 지역은 조금 무리하거나, 국책사업 선정 과정에서 한두번 미끄러진 공약도 후보에게 들이미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전남은 제주와 사이 해저터널 카드를 또 꺼냈다. 서울~제주 고속철도를 놓자는 것인데, 사업비가 16조8천억원으로 추산된다.
이 사업 또한 4차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에 반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남은 목포~해남(79.8㎞)은
지상 철로, 해남~보길도(9.2㎞)는 해상 교량, 보길도~제주(90.1㎞)는 해저터널을 짓는 서울~제주(총 179.1㎞) 고속철도 건설을 국정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18대·19대 대선 때도 추진됐다가, 제주 쪽 반발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사업의 다른 한 축인 제주도의 반대는 여전하지만, 전남은 지난 8일 재경 광주·전남향우회의 윤석열 후보 초청간담회, 지난 13일 이재명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7일 정의당 정책위원회 등에서 사업설명을 하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달 30일 청주에서 시민 등과 충청권 광역철도 청주 도심 통과 추진 약속을 했다. 청주도심통과 광역철도 쟁취 범시민비상대책위원회 제공
부산에선 경부선 철로 지하화 사업이 다시 등판했다. 민주당이 21대 총선, 지난 4월 부산시장 보궐선거 때 내놓았던 공약이다. 1조5810억원을 들여 구포역~사상역~부산진역(16.5㎞) 지상 구간을, 구포역~백양산~부산진역(13.1㎞) 구간으로 변경해 지하화하는 내용이다. 부산의 동서 균형발전,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부산시가 벌인 용역 결과에서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왔다. 부산시는 지난 정기국회 때 기본계획 용역비 30억원을 내년 예산에 반영해달라고 했지만 실패했다. 부산시는 여야에 “대선 때 경부선 지하화에 적극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했다.
제주는 제2공항 정상 추진을, 강원은 평화특별자치도 설치를 다시 내세웠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국가 전체 사회간접자본 예산이 20조원 남짓인데, 지역에서 대선 때 쏟아내는 사업들은 천문학적 예산이 소요된다. 검증도, 재정 분석도 미흡해 정작 후보들이 공약으로 채택하기 어려운 것들이 수두룩하고, 대부분 토목사업이어서 콘크리트 공화국으로 갈 우려도 있다. 지자체, 후보 모두 절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이달 안에 지방정부 대선 공약 수집·분석에 나설 참이다.
지자체 대부분의 핵심 공약에는 철도·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이 빠지지 않는다. 대부분 국가예산 투입을 염두에 둔 것인데 타당성 조사조차 없이 밀어넣으려는 공약도 많다.
광주시는 지역 현안 사업 20개를 여야에 건의했는데, 총사업비는 234조원에 이른다. 광주와 전남 5개 시군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인구 173만명 광역도시를 조성하는 ‘빛고을 스마트메가시티’ 사업을 대선 핵심 공약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타당성 조사도 이뤄지지 않아 사업비조차 추산하지 못한 상황이다. 김용진 광주시 정책연구팀장은 “대선 후보·정당 등에 지역 정책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공약에 반영돼 장차 국정과제로 채택됐을 때 국비를 확보할 논거를 마련하려고 각종 공약을 개발해 제안했다. 타당성 조사가 안 된 것은 아이디어 제공 차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대전은 경부선·호남선 철로 지하화를 대선 공약으로 키우려 한다. 경부선 대덕구 신대동~동구 통영대전고속도로 판암나들목(13㎞), 호남선 대덕구 오정동 대전조차장~
서구 가수원역(11㎞) 등 24㎞를 지하화하고, 지상 공간을 개발하려는 구상이다. 공사기간 15년, 추정 사업비 10조2천억원대로, 대전 최대 규모 사업이다. 대전시 관계자는 “여건이 쉽지 않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꼭 해야 하는 사업이다. 지역 1순위 대선 공약으로 올리려고 여론을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전북은 전주~대구 고속도로 건설(4조8578억원), 새만금~목포 서해안철도 건설(2조9928억원) 등을 제안했고, 충북은 중부권 동서횡단철도(6조152억원), 중부내륙선 복선화(3조8000억원) 등 17조1695억원 규모의 철도·도로 확충 사업 8개를 제안했다. 대구~광주 달빛고속철도 조기 건설도 4조5158억원이 드는 대규모 사업이다.
공항 관련 공약도 눈에 띈다. 충북은 청주공항 주변 복합신도시 조성 등
5조7천억원 규모의 청주공항 허브화 사업을 내놨고, 대구는 경제물류공항 건설(17조4184억원) 카드를 꺼냈다. 충남은 서해 관문 국제공항 건설과 서산 해미 공군부대를 활용한 충남 민항 취항을 제안했고, 인천은 백령공항 건설 계획을 내놨다.
지역을 광역경제권으로 묶는 ‘메가시티’ 조성도 단골 공약이다. ‘부울경 메가시티’에 이어 대전·충남·충북·세종은 ‘충청권 메가시티’, 대구·경북은 ‘대구경북 글로벌메가시티’ 건설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만형 충북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사업을 대거 선정하면서 대형 국책사업 문턱을 낮춰준 것도 지방정부가 선거 때 각종 공약을 대거 제안하는 한 원인이다. 한편으론 지방정부의 몸부림으로 보이지만 검증 없는 사업은 낭패를 부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동연 대선 후보가 지난 1일 청주에서 시민들과 충청권 광역철도 청주 도심 통과 추진 약속을 했다.청주도심통과 광역철도 쟁취 범시민비상대책위원회 제공
자치단체 공약 ‘밀어넣기’에도 지역에 따라 온도 차가 있다. 이재명 전 지사가 대선 후보로 나선 경기도는 공약 개발, 건의 등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후보가 경기도에서 추진한 기본소득, 기본대출 등을 대선 공약으로 차출한 터라 오해를 살 수 있다며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수도권 광역의회 의원들은 지난 13일 김포공항 이전에 따른 국가균형발전 공약을 공동 건의했다. 이들은 “김포공항을 이전하고 대체 공항으로 청주·원주·새만금·대구공항 등을 활용하면 국가균형발전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발굴한 공약을 후보·정당에 건의하고 채택에 목을 매는 다른 지역과 달리 여유 있는 모양새다. 같은 수도권이지만 인천은 경인고속도로 지하화, 제4경인고속도로 신설 등 굵직한 토목사업과 영흥화력발전소 1·2호기 조기 폐쇄 등 환경공약을 제안했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김경수 지사가
낙마한 경남도 대선 공약 제안에 소극적이다. 5세대 기반 제조업 메타버스 구축, 경남형 수소경제 혁신플랫폼 구축 등 12대 핵심 건의사업을 각 정당에 보냈는데, 대부분 진행 중인 것들이다. 경북은 30개 안팎의 중점 사업을 추리고 있다.
부유식 해상풍력 환태평양 제조기지 구축(울산), 환황해 수소에너지 메카 조성(충남), 대통령 세종집무실 설치(세종), 육아기본수당 전국 확대(강원) 등 지역밀착형 특화 공약도 눈에 띈다. 이두영 균형발전국민포럼 공동대표는 “지방정부가 선거 때마다 토목사업 위주의 각종 공약을 후보·정당 등에 제안하는 것은 인구·경제 등 모든 것이 수도권에 몰려 있는 한국 사회의 불편한 현실 때문이다. 타당성·실현가능성·재원 등 충분한 검증 없이 후보·정당 등에 공약을 제안하는 것은 문제다. 후보, 유권자가 헛공약을 가려내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전국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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