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이 가파른 일본 나가사키시 구라바 언덕에 있는 길이 160m, 너비 12m 반원통형 터널 모양의 사행 승강기를 타려고 주민과 관광객들이 1층 문으로 들어서고 있다.
[현장 쏙] 도시혁신, 아시아를 바꾼다 ① 일본 나가사키 ‘산동네 공동체’
주민·시민사회, 정부·지방자치단체, 기업 등 3자가 힘과 지혜를 합쳐 주거·복지·교육·교통·일자리 등 사회문제들의 해법을 찾으려는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 방법으로 도시를 혁신하려는 실험이 나라 안팎에서 활발하다. <한겨레>는 5월15일치 창간기념호에서 영국·프랑스·미국·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의 도시혁신, 사회혁신 현장을 찾아간 데 이어, 아시아 곳곳의 도시혁신 현장을 살펴본다.
비탈이 많은 일본 규슈 나가사키시의 노약자 이동을 돕는 승강기·모노레일, 싱가포르의 영세상인 자립을 뒷받침하는 공동매장, 타이 방콕 해고노동자들의 의류업체 지키기, 중국 상하이에서 원주민과 이주 예술가가 일군 도심 재생 실험, 홍콩의 공공주택단지 가꾸기, 인도 마가르파타의 농민들이 주도한 자치도시 등이 그 현장이다. 국내의 다양한 도시혁신 실험도 들여다본다.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는 제4회 아시아 미래포럼이 ‘포용성장 시대: 기업과 사회의 혁신’을 주제로 10월30~31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다. 아시아 곳곳의 사회혁신과 도시혁신 사례들은 종합세션과 분과세션 ‘사회적 소통과 도시혁신’ 등에서 심층적으로 조명한다.
사행 승강기를 타면 아래쪽 노면전철역에서 약 70m 위 관광지 구라바엔까지 3분 만에 오를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계단을 300개 넘게 올라야 한다.
나가사키시 제공
도로망 부족·복지 지원 제약 많아
시, 17억엔 들여 승강기 2대 설치 험한 비탈길 이동수단으로 인기
하루 1500명·연 55만여명 이용 “아랫동네 병원·시장 갈 때 타요
덥거나 비올 때도 참 편리해요”
인구 유출 막고 공동체 유지 도와 나가사키시는 두 승강기 건설에 예산 17억1000만엔을 들였다. 경사지 주민들은 물론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로 알려진 관광명소인 구라바엔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돕자는 것이었다. 오우라지구는 국가사적과 상업지역이 인접해 있고, 65살 이상 노인 비율이 높으며 20년 넘은 노후 건물도 즐비했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30분까지 가동하는 승강기 이용자는 하루 1400~1500명, 연 55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공공시설이어서 누구나 무료로 탈 수 있다. 나가사키 관광지도엔 승강기들이 ‘구라바 하늘길(Sky Road)’로 표기돼 있다. 가타에 신이치로(49) 나가사키시 마을만들기 추진실장은 “나가사키를 걷기 좋고 살기 편한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가려 한다”며 경사지 이송수단 확대, 빈집의 공원·광장 활용, 개항 역사유적지의 복원 등을 펼친다고 소개했다. 관광객들을 안내하던 기하라 히데오(68)는 “한해 100만명이 구라바엔을 찾는다. 일정에 쫓기는 관광객들한테 시간을 벌게 해준다”고 귀띔했다. 학부모 쓰루다 시토미(33)는 “자녀가 다니는 소학교를 방문할 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나가사키시는 항구 주변을 높이 400~500m 산들이 둘러싼 모습이다. 인구가 늘면서 시가지는 1960년대에 해발 150m, 70년대에 180m, 80년대에 200m까지 산자락을 타고 올라갔다. 도시 생활에 무리가 없는 경사 12~14%를 넘어 주택 건설의 한계로 여겨지는 경사 27%까지 시가지가 들어섰다. ‘사면 도시’는 채광·일조·통풍이 평지보다 좋고 경관도 낫다. 그런데 자동차 도입 전부터 도시가 확장되면서 도로망이 부족하고 수백만개 계단이 깔렸다. 오물 수거, 화재 진압, 구급 활동, 복지 지원 등에도 제약이 많다. 젊은 세대의 유출을 초래해 활력을 떨어뜨리고 인구의 고령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됐다. 나가사키시는 1989년 비슷한 고민을 안은 부산·샌프란시스코·홍콩 등 도시 15곳의 전문가 300여명을 초청해 ‘국제 사면도시 회의’를 열어 정책 대안을 교환했다. 회의는 경사지 공동체를 지킬 정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킨 계기가 됐다. 나가사키시의 복지·의료·건축·환경·토지 전문가들도 97년 사면도시연구회를 꾸렸다. 모임 대표 구리하라 마사키(재활의학과 의사)는 뇌졸중·관절염 환자를 추적조사하다가 경사지 주민은 재활치료가 어려워 재발률이 높다는 점을 확인하고 대안 연구에 나섰다. 경사지 승강기들은 인구 유출을 막고 산동네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공익적 기능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나가사키시 공무원 하마다 다카히로는 “워낙 이용자가 많고 만족감도 크다. 승강기를 두고 불만을 제기하는 민원은 없다. 관리비도 꽤 들지만 효과가 더 크다는 게 중론”이라고 말했다. 일본 문화를 체험하러 나가사키를 찾은 대학생 장한솔(19·1년)씨는 “까마득해 보이는 산 중턱까지 단숨에 올라갈 수 있어 편리했다. 다른 도시들도 시도해볼 만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사업은 일본 정부가 제안해 추진됐다. 주민들한테 호응을 얻었지만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나가사키시 경사지에 시가 지어 운영하는 ‘커뮤니티 공동주택’의 승강기도, 인근 주민들에게 개방된 통행로 구실을 한다. 차츰 늘어나는 경사지 빈집들은 기증받아 오토바이 주차장이나 공원 같은 공공용도로 활용한다고 한다. 6년 전부터 기증받은 토지·건물이 42곳에 이르고, 평균 120㎡쯤 된다. 가타에 신이치로 마을만들기 추진실장은 “경사지의 낡은 목조주택을 헐고 신축하려고 해도 철거비·건축비가 만만치 않아 기부하려는 주민이 꽤 있다”며 “행정 쪽이 주도하려 들면 계획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동네에 애정이 있고 경험도 풍부한 주민들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면 주민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가사키/글·사진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모노레일, 산동네 노인들의 발 노릇 톡톡”
나가사키시 덴진마치 비탈길에 설치된 모노레일의 2인승 리프트에서 어르신들이 내리고 있다.
65살 이상만 공짜로 이용
나가사키시가 점검 맡고
마을주민자치회서 관리 나가사키시 옛 도심의 전형적인 경사지 동네인 다테야마마치에서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끝에 다다르면, 너비 3m 계단 길의 가운데로 공중에 모노레일이 설치돼 있다. 모노레일엔 가로 0.9m, 세로 0.75m, 높이 2m 크기 상자형 리프트가 매달려 있다. 지난 8월4일 오후 택시에서 막 내린 70대 중반 주민이 짐꾸러미 4개를 들고 ‘사쿠라호’라고 쓰인 분홍빛 리프트로 다가갔다. 그는 허리 높이쯤 있는 안전바를 올리고 리프트 안에 들어가 앉았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리프트 벽면 구멍에 넣고는 그 아래 있는 작동 스위치를 눌렀다. 리프트가 위~잉 하는 소리를 내면서 느릿느릿 계단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다. 3분쯤 지나 리프트가 종점에서 멈추자 짐꾸러미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산동네 계단 길을 다시 걸어 올라갔다. 나가사키시는 경사지 주민들을 위한 공공 이동수단으로 사행·수직 승강기를 설치한 데 이어 소규모 이동수단에도 눈을 돌렸다. 2002년 3월 덴진마치, 2003년 7월 다테야마마치, 2004년 6월 미즈노우라마치 등 3곳에 2인용 모노레일을 설치했다. 모노레일은 1곳당 설치비 3000만엔 안팎, 연간 관리비 260여만엔이 들어가는 저예산 이동수단으로 주목했다. 주택이 밀집한 비탈진 산동네에 도로를 새로 놓으려면 땅을 매수하고 주택을 보상하는 등 많은 예산을 들여야 했기 때문에 애초 있는 계단을 이용하자는 방안이었다. 모노레일은 65살 이상 어르신들만 이용할 수 있다. 모노레일 작동 카드를 나가사키시가 나눠준다. 사람 2명, 화물 150㎏까지 태울 수 있는 리프트는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6시30분까지 전기로 가동된다. 시 소유 시설이지만 동네마다 꾸려진 마을만들기 자치회가 관리한다. 시에선 모노레일 설비의 설치·점검, 이용자 카드 발급, 전기료 정산 등을 맡고, 자치회는 운행과 청소, 고장·사고 보고, 운행일지 작성, 이용자 수 기록 등을 나눠 맡는다. 모노레일 설치 장소는 주민의 노령화율이 높고, 소학교(초등학교)나 공민관(주민자치센터) 같은 공공시설 주변이며, 토지·건물 소유자들이 협조하는 곳에서 선정했다고 한다. 리프트를 가동할 때 계단을 걷는 이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계단 너비를 2m 이상 확보했다. 시 공무원 시마모토 지아키는 “모노레일을 설치해달라는 경사지 동네가 많은데, 우회할 수 있는 도로가 있으면 모노레일을 설치하지 않는다. 노인층이 밀집한 동네에 설치했다”고 말했다. 덴진마치 모노레일 주변에서 만난 혼다 다쿠야(29)는 “다리나 무릎이 아파도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발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말했다. 나가사키/글·사진 안관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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