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를 찾아온 한국인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14일 중국 상하이 타이캉루 톈쯔팡(전자방·田子坊)에 있는 예술센터. 유화전 안내를 하는 예메이쥐는 놀라워했다. 12일부터 전시회를 열었는데 하루 관람객은 60여명쯤 된다고 했다. 식품 가공기계 공장을 개조한 건물 2층 예술센터 아래 너비 2~3m의 골목마다 가게나 술집이 늘어서 있다. 유럽 쪽 관광객들과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붐비고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이곳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화가들을 찾는 이들은 드물다. 톈쯔팡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와 풍경이 비슷하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전통 공예품 상점 거리가 아니다.
중국 상하이 톈쯔팡의 옛 공장 건물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가 류보원(오른쪽)이 14일 자신을 찾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화가들의 둥지에서 예술거리로 톈쯔팡에서는 ‘스쿠먼’(석고문·石庫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오래된 주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스쿠먼은 19세기 상하이의 독특한 주택 구조로, 네모난 건물의 출입문 양쪽에 반원형의 기둥을 돌로 만든 게 특징이다. 상하이 도심에 자리한 이곳은 편도 1차로 좁은 찻길 너머에 고층 건물들이 늘어선 것과 달리, 낡은 스쿠먼 주택들과 1930년대 만들어진 옛 공장 건물 6개가 그대로 남은 서민 거주지였다. 1998년 이곳을 상하이 화가들의 일번지로 만든 사람은 천이페이(1946~2005)를 비롯한 중국의 유명 예술가들이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곳곳의 화가들이 하나둘 이곳의 낡은 공장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톈진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랴오닝성의 한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던 우판(60)도 그런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2005년 톈쯔팡에 둥지를 튼 그는 “원래 이곳은 좁고 어두운 지역이었다. 도심이지만 임대료가 싸니까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었다”고 말했다. 톈쯔팡 들머리에는 ‘창의산업 발원지’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고 2006년에는 중국에서 최우수 창의산업단지로 꼽히기도 했다.
낡은 공장·주택 밀집가 ‘톈쯔팡’
철거 방식 벗어나 기존 건물 개조
우수 ‘도심 재생’ 사례로 주목받아
창의산업 대표 단지 ‘라오창팡’
흉물 도축장에 예술단지로 새옷
일각선 지나친 상업화 우려도
톈쯔팡이 새로운 도심 재생의 사례로 주목받는 것은 원주민들이 여전히 낡은 건물 2~4층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톈쯔팡에 작업실을 연 화가 류보원(58)은 “톈쯔팡을 외국에 내세울 수 있는 건 이곳처럼 상업시설과 주민이 한데 섞여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원주민인 노인들이 낡은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는 옆에서 여행을 온 서양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현대와 과거의 병존이다”라고 말했다. 1만5000㎡에 이르는 톈쯔팡 일대에는 주민 수백명이 여전히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점과 예술 전시장이 있는 1층 바로 위를 올려다보면 주민들이 창문에서 대나무나 쇠로 만든 장대를 길게 빼서 널어놓은 옷이나 이불이 장식품처럼 내걸려 있다.
톈쯔팡의 낡은 건물에 깔끔하게 단장한 카페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음료를 즐기고 있다.
■ 옛 도축장에서 최신형 자동차 발표 상하이 황푸강의 지류 옆 ‘1933 라오창팡(노장방·老場坊)’은 1933년 영국인이 설계할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도축장이던 건물이다. 날마다 소 300마리가 도축되던 건물은 서양인들이 위생적으로 쇠고기를 먹으려고 만들었다. 이곳은 지금 상하이를 대표하는 창의산업단지 가운데 한 곳이다. 나팔 모양의 기둥, 도축되는 소가 끌려갔던 우도, 고기를 신선하게 유지하려고 만든 바람길 따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은 1950년대까지 도축장으로 쓰인 뒤 제약기계 공장으로 활용되다 흉물로 방치됐다.
상하이 기업들은 1억2000만위안(210억원)을 들여 2006년부터 새 단장을 한 뒤 디자인을 비롯한 예술 관련 업체들을 입주시켰다. 건물 옥상에 따로 마련된 공간은 유명 자동차를 비롯한 상품 발표회나 결혼식 등의 행사장으로 쓰인다. 17일에는 북한 작가들의 그림·도자기 90여점을 선보이는 전시회도 열리고 있었다. 반면 라오창팡과 바로 잇닿은 곳에는 2층짜리 낡은 건물에 상점과 주택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톈쯔팡처럼 주민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 상하이 창의산업센터 직원 저우충루이는 “라오창팡 도축장이 들어선 시기에 영국·미국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지만 모두 철거됐다. 현재 이곳의 입주율은 85%에 이른다”고 말했다.
중국 상하이의 1930년대 도축장 건물을 창의산업단지로 바꾼 ‘1933 라오창팡’에 15일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있다.
■ 지나친 상업화는 한계 톈쯔팡과 라오창팡은 현재 위기에 맞닥뜨려 있다. 옛 건물을 살리면서 주민들의 삶 또한 파괴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달리, 상업시설 증가와 높은 임대료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톈쯔팡에서 활동하는 화가 우판은 “2005년 화가들이 한창 톈쯔팡에 모일 때에 견줘 지금은 임대료가 20배 가까이 올랐다”고 말했다. 중국 소수민족 먀오족(묘족)의 전통 자수 공예품을 톈쯔팡에서 2000년부터 팔아온 쑨리리(45)는 “예전 화가들만 있을 때는 조용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상업적인 분위기가 너무나 강하다”고 말했다. 특히 술집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원주민들의 불편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날마다 톈쯔팡 거리에서 일인시위를 한다는 한 주민은 “새벽 1~2시까지 술 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는 탓에 잠을 못 잘 지경”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라오창팡은 높은 임대료가 큰 걸림돌이다. 7년 전 한국에서 상하이로 온 뒤 라오창팡에서 최근까지 2년 남짓 약 330㎡(100평) 규모의 결혼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한 김기환(37)씨는 “한달 임대료가 5만8000위안(1000만원)가량인데 이 정도면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맞먹을 정도다. 영세한 작가들은 입주 자체가 어렵다”고 전했다.
상하이 도심 재생 사례를 연구해온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상하이 톈쯔팡, 라오창팡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근대 공업 유산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서울의 경우 옛 구로공단 건물들 가운데 일부는 보존해서 창의산업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상하이/글·사진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낡은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 제대로 인식해야”
허쩡창 상하이 창의산업센터장
톈쯔팡·라오창팡 ‘도심 재생’
50여곳 디자인 단지도 조성
“옛 건물 보호하되 활용안 찾아야”
중국 상하이 톈쯔팡이나 1933 라오창팡을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곳은 상하이 창의산업센터다. 2004년 11월 설립된 창의산업센터는 상하이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동시에 민간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모두 50여곳의 디자인 단지(클러스터)를 만들었다.
2013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등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허쩡창(55·사진) 상하이 창의산업센터장은 9일 서울 종로구 서울디자인재단에서 <한겨레>와 만나 “낡았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건물들을 보호하되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정부 예산 지원에 의존하지 말고 일부를 시장에 맡겨서 자생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창의산업단지가 된 뒤 톈쯔팡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그는 “보존과 개발 양면이 모두 중요하다. 특히 문화에 핵심을 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심 속 작은 주택·건물들은 정부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원주민들이 만족할 수 있고 활력있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모델을 만드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며 한계도 인정했다.
허 센터장은 역사적 가치를 품은 건물을 보존하면서도 활용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을 다섯가지로 든다. 건물 자체의 안전성을 확보하고 되도록 원래 모습을 유지해야 하지만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건물을 새로 단장할 때 원형을 알아볼 수 있고 다시 옛 상태로 되돌릴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는 “옛 공장 건물은 공업 문명이 남긴 유산이고 이와 관련된 역사·사회·문화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 낡은 산업 건축물이 갖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외국 사례를 모방만 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그는 “10년 동안 옛 공장들을 개조하면서 경험한 점이 많다. 상하이 창의산업센터는 2004년 설립 뒤 국내외 도시 30여곳과 교류·협력 관계를 맺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기업이나 예술가들을 지속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힘써왔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진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