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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전범과 소설가 사이 / 권혁철

등록 2014-10-07 18:54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괴산에는 임꺽정들이 산다. 소백산 줄기에 자리잡은 충북 괴산 곳곳에는 수염이 잔뜩 난 털북숭이 임꺽정 동상이 세워져 있다. 괴산의 공식 마스코트는 임꺽정이다. 괴산군 누리집을 보면, 임꺽정이 지역 특산물인 고추를 번쩍 들고 있다. 임꺽정 마스코트는 부정과 부패에 맞서 민중의 편에 섰던 임꺽정의 친근감 있고 당당한 인상을 느낄 수 있게 디자인했다고 한다. 괴산군은 지난 8월 말 괴산고추축제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리틀 임꺽정을 뽑았다.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괴산과 무슨 인연이 있을까. 괴산과 임꺽정의 연결고리는 소설가 벽초 홍명희(1888~1968) 선생이다. 일제강점기 <임꺽정>을 집필한 벽초는 괴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009년 괴산군은 도로명 주소를 준비하면서 벽초의 생가 앞 도로 4075m(너비 9m) 구간에 ‘임꺽정로’란 이름을 붙였다. 올해부터 도로명 주소가 시행되면서 벽초 생가의 주소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에서 ‘충북 괴산군 괴산읍 임꺽정로 16’으로 바뀌었다.

괴산군은 임꺽정을 지역 상징으로 알리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벽초는 굳이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주변 도로 이름이 임꺽정로가 됐지만 홍명희 생가 근처에는 ‘순국열사 일완(一阮) 홍범식 고택’이란 안내판이 걸려 있다. 내비게이션이나 포털의 길찾기에서도 ‘홍명희 생가’를 입력하면 ‘홍범식 고택’이 뜬다. 벽초의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를 지내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자결한 애국지사다.

벽초가 고향에서 잊혀진 인물 취급을 받는 것은 남북 분단 때문이다. 벽초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북쪽에 남아 부수상을 지냈다. 이후 금서로 묶였던 <임꺽정>은 87년 6월 항쟁 뒤 민주화 열기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다.

벽초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홍명희문학제는 1996년 충북 청주에서 처음 열린 뒤 청주와 괴산, 서울에서 번갈아 열렸다. 지난해 괴산에서 문학제를 앞두고 보수단체가 반대시위를 벌이자, 주최 쪽은 올해에는 괴산에서 행사를 열지 않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로 19번째인 홍명희문학제는 경기도 파주 북소리축제 기간인 11일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다.

보수단체들은 벽초가 북쪽에서 부수상을 지내 한국전쟁의 전범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북쪽 고위직을 지낸 벽초의 정치적 판단과 행적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벽초가 한국전쟁의 전범이란 주장은 지나치다. 권위 있는 한국전쟁 연구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북한지도부가 한국전쟁을 결정할 때 홍명희 등은 반대 내지는 적극적 찬성파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304쪽)

지난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한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는 “남측 응원단과 선수들이 사심 없는 응원을 했고… 구호도 부르고 통일기도 다 흔들면서 응원하는 것을 보고 체육이 조국통일을 위한 데에서 앞섰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 확인했듯이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고 상호 신뢰를 쌓으려면 체육·문화 같은 비정치적인 분야에서 물꼬를 트는 게 현실적이다.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하려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되 같은 점을 찾는 구동존이의 자세가 필요하다. <임꺽정>은 남북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공감대다. 벽초를 전범으로 규정해 계속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 가둬놓을지 남북화해의 마중물로 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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