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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의 전셋집 순례기 [한겨레 프리즘]

등록 2024-01-16 19:33

서울 마포구 공덕동 일대 단독주택, 빌라촌.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박현정 | 인구·복지팀장

보증금 없이 살던 월셋집을 떠날 날을 석달 앞두고 전셋집 물색에 나섰다. 공공임대나 장기전세주택부터 알아봤지만 소득기준이 맞지 않았다. 시세보다 저렴한 사회주택 역시 입주할 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떠들썩했던 전세사기를 피하기 위해선 매매가와 전세가 차이가 큰 오래된 아파트가 나을 성싶었다.

대중교통으로 회사까지 4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예산 범위 안의 아파트는 서울에 몇곳 없었다. 주말 짬짬이 집을 보러 다닐 때마다 기가 쭉쭉 빨려나갔다. 누군가 사는 집에 들어가 재빨리 이곳저곳을 살피는 건 고됐다. 세 집을 연달아 보다 녹초가 된 그날, 예산을 초과하는 전세보증금을 요구한 집을 덜컥 가계약해버렸다.

은행이 담보로 잡고 있는 집이었으나 부동산 중개소에선 ‘무융자’라고 했다. 임대인이 보증금을 받아 빚을 갚는 조건이기에 융자가 없는 상태로 입주한단 뜻이었다. 그런데, 돈만 받고 빚을 갚지 않는다면? 피 같은 목돈을 날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들이닥쳤다. 최근 전세계약을 한 지인들에게 안전한 계약인지 상담을 청했다. 혹여 불리한 내용은 없는지 특약사항에 신경을 곤두세운 끝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남보다 늦된 인생 첫 전세계약을 하곤 새해 벽두부터 앓아누웠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22년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가구의 57.5%는 자가에서 살고 전월세 등 임차 거주는 38.8%다. 열 가구 중 넷은 전월세로 인한 심신 고통을 정기적으로 겪고 있을지 모른다. 자가 거주자의 평균 거주 기간은 10.9년인데 임차 가구는 3.4년에 그친다. 주위를 둘러보면 집 문제로 마음고생했다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주거 문제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얼마나 큰지 가늠이 안 됐다.

주택 점유 형태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핀 국외 연구가 있다. 영국 에식스대학과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대학 연구진이 지난해 10월 ‘역학과 지역사회 건강 저널’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영국 민간주택 세입자는 자가나 사회임대주택(지방정부·주택협동조합 등이 공급하는 주택) 거주자보다 생물학적 노화(신체 조직·세포 기능 저하)가 더 빠르게 진행됐다. 세입자로 사는 건 실업·흡연보다 노화 유발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 가구패널조사(BHPS)에 참여한 1420명의 주거 관련 정보와 이들의 혈액 속 디엔에이(DNA) 분석을 통해 노화 진행 정도를 파악한 결과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런 내용의 연구 결과를 보도하며 민간주택 임차는 자가와 사회임대주택보다 비용이 더 들면서도 집 상태는 나쁘고 불안정한 주거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임대료 인상 제한, 집 상태 개선, 무과실 퇴거 금지 등 세입자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의 주거 빈곤 상황을 조사하러 2018년 서울을 찾았던 레일라니 파르하 당시 유엔 ‘적정주거권 특별보고관’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설명한 적정주거권이란, 집 면적이나 시설뿐 아니라 형편에 따라 부담 가능한 비용으로 지속 거주가 가능한지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여전히 낯선 권리다.

새해 초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이 바라는 주택’을 주제로 한 민생토론회에서 “25~30년 된 아파트가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토론회에 앞서 1기 신도시인 경기도 일산의 33년 된 아파트를 방문해 시설 등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동안 줄곧 강조해왔던 시장 원리에 따라 자유로운 재산권 행사를 위해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풀어주겠다는 약속이 이어졌다.

분명 전셋집을 스스로 고르긴 했는데, 정보 비대칭이 큰 주택시장에서 진정한 자유 선택이 가능한 걸까. 계약 기간이 끝나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은 뒤엔 돈을 더 보태지 않아도 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저런 걱정과 투덜거림 속에서도, 수도권 지상철도 지하화 사업을 보도한 뉴스에 자꾸만 눈이 간다. 내 집 마련 소망을 품게 된 무주택 직장인의 현실이다.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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