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광주 금남로에서 고 백남기 농민의 운구차를 따라 시민들이 만장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고 백남기(69) 농민은 펼침막 속에서 징을 치며 미소짓고 있었다. 네델란드에서 온 손주 지오(4)가 연단에 섰다. 백씨의 막내 딸 민주화(30)씨가 아들 지오의 손을 잡고 <농민가>를 불렀다. 평생 농민으로 살았던 백씨가 좋아했던 노래이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수줍게 노래하는 손주의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까?
6일 광주 금남로 고 백남기 농민의 노제 행사에서 백씨의 딸 민주화(30)씨와 손주 지오(4)군이 농민가를 부르고 있다.
“317일동안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6일 오후 12시50분 광주시 동구 금남로에서 시민 5천여 명이 참석해 열린 ‘고 백남기 농민의 노제’ 행사에서 백씨의 딸 민주화씨는 그동안의 소회를 담담하게 밝혔다. 민주화씨는 “317일동안 한번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지금껏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와중에도 불안에 떨어야 했고, 무서워해야 했고, 분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 곁에 함께 해주신 많은 국민들 덕분에 그 시간을 다 이겨냈고, 부검이라는 그 끔찍한 현실에서 아버지를 구해냈고, 다행히 이렇게 아버지께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백씨의 아내 박경숙(63)씨는 딸이 건네는 유족인사를 듣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고인의 주검은 5일 밤 서울에서 고향인 전남 보성의 한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안치됐다가, 이날 오전 웅치면 부춘마을 생가에서 노제를 지낸 뒤 광주 금남로에 운구됐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고인은 5·18민주화운동 직전인 80년 5월17일 계엄을 확대한 신군부에 의해 기숙사에서 체포돼 영어의 몸이 돼 고초를 겪었다. 광주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는 백씨의 5·18관련 보상자 인정 여부를 심의하고 있다.
이날 고인의 광주 금남로 노제는 문경식 고 백남기농민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인사로 시작됐다. 문 위원장은 “고인을 살인 물대포로 쓰러뜨린 뒤 수사도, 단 한마디의 사과도, 책임자 처벌도 거부한 채 사인 조작용 부검을 강행하려던 살인정권은 이제 국민의 총궐기로 붕괴되고 있다”며 “이제 살아있는 저희들이 어르신이 주신 유산을 계승해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민주주의정의를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김명섭 신부(천주교 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는 “생명 평화의 삶을 살아온 고인은 죽지 않고 부활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6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고 백남기 농민의 노제에서 유족들이 운구차를 따라 행진하고 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국제적 연대의 목소리도 나왔다. 히다얏 그린필드 국제식품연맹 아태지역위원회 사무총장은 “고인의 죽음에 대해 이 정부가 침묵하는 것은 우리의 투쟁을 침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뒤 “127개국 노동자가 함께 하고 있다. 우리는 25개국 언어로 고인의 죽음과 희생과 타살에 대해 알리고 공유했다”고 밝혔다.
이날 바리톤 정찬경씨가 생전 고인이 좋아했던 노래 <직녀에게>를 불렀다. 고인의 부활을 기원하는 씻김굿 공연도 올려졌다. 광주전남교육문화원 솟터 회원들과 놀이패 신명의 오숙현씨 등 문화예술인들이 고인의 넋을 모셔 고를 풀고, 길을 닦아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이들은 고인이 천주교신자라는 점을 고려해 ‘극락세계 가시라’는 사설을 ‘천주님전 모시세’라고 바꿔 불렀다.
금남로 운구 행진이 시작되기 전 참석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유족들은 ‘살인정권 퇴진하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운구차의 뒤에 섰다. 광주지역 노래패들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과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의 노래를 고인에게 바쳤다. 금남로에 운집한 시민들도 노래를 함께 부르고, 고인의 장례차에 손을 얹고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묵념을 올리며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양재석(59)씨는 “슬퍼서 노제에 참석했다. 이제 편안히 잘 쉬시기를 바란다.우리들이 고인의 뜻을 꼭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백남기가 쓰러진 아스팔트로 가자/핏자국 선명한 자리에서 신발끈 동여매자…백남기여 부활하라/산자여 함께 가자~” 이날 오후 1시24분 운구 행렬이 시작됐다. 연단에선 들꽃처럼 살아 온 백남기 농민의 삶을 추모하는 조시가 울려 퍼졌다. 은은하게 미소짓고 있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린 대형 영정이 앞섰고, ‘생명 평화 일꾼 백남기’라고 적힌 펼침막을 관을 삼아 든 상여꾼들이 뒤를 섰다.
6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고 백남기 농민의 노제가 끝난 뒤 운구행렬이 중앙로를 지나고 있다.
운구차를 따라 지친 걸음을 뗀 유족들 뒤로 ‘국가폭력 끝장내자’, ‘특검을 실시하라’고 적힌 100여 개의 만장을 든 시민들이 긴 줄을 섰다. 운구행렬은 금남로~대인시장~계림오거리~광주고 앞을 거쳐 북구 서방시장까지 이어졌다. 고인의 주검은 화장된 뒤, 이날 오후 5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인 5·18 구 묘역에 안장된다.
광주/글·사진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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