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법원,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인정했는데
미 군정 상태로 일으킨 무력 투쟁으로 기술해
유족들 “수십년 노력해 진실 조금씩 밝혔는데…”
미 군정 상태로 일으킨 무력 투쟁으로 기술해
유족들 “수십년 노력해 진실 조금씩 밝혔는데…”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정부와 법원이 인정한 대구 10월항쟁이 국정 역사교과서에는 조선공산당의 투쟁으로 서술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수십년 동안 노력해 진실을 일부 밝혀 놓은 10월항쟁 유가족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교육부가 지난 28일 공개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248쪽에 대구 10월항쟁에 대해 짤막한 서술이 나온다. 이 교과서는 10월항쟁에 대해 “신탁 통치 문제로 인한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조선 공산당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영남의 유혈 충돌 사건 등을 일으키며 미 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10월항쟁을 신탁 통치 문제로 조선 공산당이 미 군정을 상대로 일으킨 무력 투쟁으로 기술한 것이다.
하지만 2010년 3월 대통령 직속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대구 10월항쟁이 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놨다. 당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내놓은 조사 보고서에는 “해방 직후 미 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돼있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주민봉기 형태로 일어난 이 항쟁은 10월6일까지 경북으로 번졌다. 그해 12월 중순까지는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5개월 동안 조사를 벌여 60명이 경찰에 의해 학살된 사실을 확인했다.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당시 조사 보고서에서 “이는 대구, 칠곡, 영천, 경주지역의 일부만 조사한 결과이므로 이 사건의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0월항쟁 유족회는 매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대구시도 지난 8월 ‘대구광역시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도 유가족들이 이겼다. 10월항쟁 유족회는 당시 민간인 113만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0월항쟁 때 아버지를 잃은 채영희(71) 10월항쟁 유족회장은 “10월항쟁은 유가족들이 수십년 동안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폭동’에서 ‘사건’으로, ‘사건’에서 ‘항쟁’으로 진실을 조금씩 밝힐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10월 항쟁을 조선 공산당이 한 것이라고 국정 역사교과서에 적어 놓은 것을 보고 치가 떨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도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인정했고, 지방자치단체도 조례를 제정해 지원하는 10월항쟁을 왜 저런 식으로 왜곡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대구/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이슈국정교과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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