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전북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행복한 노인학교’에서 교사인 박후임 진안군 귀농귀촌인협의회장(목사)이 이 학교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에서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하기로 한 뒤 처음 배출된 여성 목사 9명 중 한 사람인 박 목사는 12년 된 귀농인이다. 그는 하늘과 땅과 바람, 자연을 몸으로 체화한 시골 노인들을 통해 “더 크고 깊고 넓은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듯했다. 진안/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시집 올 때 입마개 인절미 담아 왔다. 폐백 볼 때 떡이로 입 마아(막아) 준다. 시집사리할 때 잔소리 하지 마아고(말라고) 방패하는 짔이다. 52년 댔다(됐다) -배덕임’
세월의 흔적이 잔뜩 내려앉은 목기 앞에 놓인 설명문은 비뚤비뚤한 할머니 글씨체였다. ‘나 스무살 먹어 시집올 때 어머니가 해주신’ 사기 요강, ‘지와장을 곱게 빵가서 짚쑤세미로 닦던’ 놋그릇 두 벌, ‘옛날에 우리 상할아버지가 쓰시던’ 제기그릇도 나란히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전북 진안군 동향면의 ‘학선리 마을박물관’ 전시실이다. 폐교를 빌려 마련한 전시실 입구에는 ‘오래된 길, 미래를 열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때 아이들로 떠들썩했을 운동장엔 잡초가 우거지고 색 바랜 이승복 동상만 남아 있지만 여전히 이 마을엔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행복한 노인학교’. 화력 좋은 석유난로를 가운데 두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동그랗게 책상 열을 맞추어 앉아 있었다. ‘왕언니’로 불리는 최병임(87) 할머니가 책을 펴들고 떠듬떠듬 자작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내가 컬적이/ 어머니 사랑한단 말/ 한 마디도 못 해보고 사라습니다/ 인재 생각하니/ 후혜 시럽습니다….”(최병임 시, ‘하고 십은 말’ 중에서)
할머니는 문득 읽기를 멈추고 눈물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할머니를 다독이며 동급생들이 시낭송을 이어갔다.
“밥을 이고 가다/ 발을 헛디뎌/ 함박이 논에/ 풍덩 빠졌네/ 나는 너무 놀라/ 풀 밑에 숨어있네/ 놉들은 배가 고파/ 아우성이네.”(권정이 시, ‘모내기 하는 날’)
한글반에서 ‘ㄱ, ㄴ’부터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이 시인이 되었다. 시집 <너 엇찌 그리 입뿌야>, 자서전 <인생이잔아>를 출간했고, 진안신문에 돌아가며 연재도 한다. 시집 표지 뒷면에 저자 사인을 부탁하자, 쑥스럽다고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들이 이내 안경을 고쳐 쓰고는 조심스럽게 또박또박 당신들의 이름을 써내려갔다. 최한순, 배덕임, 권정이, 최병임, 정이월. 그들 곁에서 자서전 쓰기를 하고 계시던 할아버지 두 분께도 사인을 청했다. 강점석, 송복동.
“저 냥반들은 대학반이여, 우린 초등반이고. 하하하.”
할머니들이 까르르 웃으며 ‘우등생’ 할아버지들을 가리켰다. 행복한 노인학교는 행복하다. 마을 노인들은 기증품을 내어 마을박물관을 마련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연극공연을 하고, 수영을 다닌다.
“다 우리 선생님 덕분이에유.”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행복한 노인학교의 교사는 박후임 목사다. 서울 구로공단 근처의 새터교회 목사로 기독여민회 회장을 맡았던 박후임은 이 마을에 내려온 지 12년째 되는 귀농인이다. 3500평 논밭을 부치며 농사를 짓고 진안군 귀농귀촌인협의회 회장을 맡아 마을 일을 돕고 있다. 할머니들이 책가방을 메고 나란히 하교한 뒤, 시집을 펼쳐든 내가 연신 감탄을 하자 그가 말했다.
“머릿속 지식은 시를 못 만드는데 이분들 언어는 그대로 시가 돼요.”
‘후임씨’라고 불리는 목사님
교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박후임 목사의 19평짜리 흙집은 거실 앞으로 탁 트인 풍경 덕분에 40평대 아파트는 되어 보였다. 그가 추녀 밑에 달아놓은 곶감을 몇 개 빼서 접시에 내놓았다.
“어르신들이 감을 못 따니까, 감 따서 ‘반띵’ 해요. 반은 드리고 반은 우리가 가져와서 매달아놓는데 지금이 딱 먹기 좋아요.”
-곶감이 정말 달군요! 근데… 제가 호칭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한글반 어르신들은 절 ‘선생님’이라 하시고, 마을에서는 그냥 ‘후임씨’라고 해요. 처음엔 절더러 ‘새댁!’이라고 불러서, ‘새댁? 누구 말이지?’ 하기도 했어요.(웃음)”
-목사님이라고 불리진 않고요?
“교회 나가면 여전히 그렇게 부르시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냥 평신도인데요 뭐. 성가대원도 하고, 어르신들 밥할 때 도와드리고 설거지, 청소 하죠.”
-마을 목사님이 설교할 때 부담스러우시겠어요. 다른 목사님이 와서 떡 앉아 계시니.
“그래서 첨엔 교회도 안 나가려 했어요. 근데 처음 우리가 여기 와서 빈집을 얻는데, 세주시는 분이 내건 조건이 ‘교회 나가야 집 준다’는 거였어요.(웃음)”
-하하하, 전도하려고요? 그래서 내가 목사다 얘기하셨어요?
“나중에 아셨죠.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새터교회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내려왔는데, ‘교회를 통해서 일을 더 하라’는 뜻이었나 봐요. 지나놓고 보니, 마을 교회를 통해서 행복한 노인학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행복한 노인학교는 2008년 1월 문을 열었다. 한글반은 일 년 내내 매주 한 번씩 모이고, 여름과 겨울 농한기에는 수영, 도예, 그림 그리기같이 다양한 특별강좌가 열린다. 마을박물관은 노인학교를 기반으로 해서 2009년 12월에 개관했다.
-원래 이런 일을 계획하고 내려오신 거예요?
“아녜요. 내려오고 한 3년 동안은 농사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사실 마을공동체가 저한테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처음엔 약간 거리두기를 했달까.”
-근데 왜 노인학교를 하시게 되었죠?
“그냥… 어르신들의 삶이 마음에 와 닿아서요. 땅을 지키고 자녀를 위해서 평생의 삶을 내주시고, 전쟁과 가난 속에서 살아온 삶이 진짜로 훌륭하고 존경받아 마땅한데, 본인들은 당신들의 삶을 부끄러워하시고 자식들한테 대물림이라도 될까봐 초조해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웠어요. 그분들의 자존감을 높여드리고 싶었어요.”
-시를 쓰고 박물관을 만들면서 이분들에게 변화가 일던가요?
“글을 모르고 사는 고통을 전 상상도 못했어요. 한글을 배워서 이름 쓰고 집 주소 쓸 수 있게 되면서 그분들 얼굴이 한결 밝아졌어요. 어르신들은 ‘받침이 틀렸네’, ‘머리가 안 돌아가네’ 하고 푸념하시지만, 전 무조건 다 좋아요. 어르신들 글은 ‘진짜’ 작품이거든요. 사실 이분들 통해서 제가 많이 배우고 있어요.”
잡초 우거진 색 바랜 학교에
2008년 문 연 ‘행복한 노인학교’
할머니들 자작시 읽다 울고
할아버지 가리키며 ‘까르르’
행복한 노인학교는 행복하다
노인학교 교사 박후임은
마을 내려온 지 12년 된 귀농인
3500평 논밭 부치는 농민이자
귀농귀촌인협의회 회장
“어르신들 삶 와닿아 시작”
-가장 크게 배우신 게 뭐예요?
“자연 앞에 겸손한 자세,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라고나 할까. 우리가 처음 농사일 배울 때, 나락모를 키우다가 하우스 관리를 잘못해서 한순간에 다 태워버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그러셨어요. ‘모가 없어서 빈 논은 본 적이 없으니, 괜찮아. 기다려봐.’ 그러곤 어르신들이 심고 남은 모를 우리한테 주셨는데, 그걸로 우리 논 다 채우고도 남았어요. 제가 비가 안 온다고, 비가 너무 많이 온다고, 바람이 세다고, 툴툴거릴 때마다 어르신들이 그러셨어요. ‘하늘은 굶기지 않아. 땅은 거짓말 안 해.’ 지내보니 진짜 그래요. 우리는 머리로 농사를 지으려는 습성이 아직 있는데, 어르신들은 평생 농사를 짓고 살면서 자연의 섭리를 몸으로 체득하고 체화한 거예요.”
-다시 목회활동은 안 하실 건가요?
“제겐 할머니를 만나는 것도 목회, 한글 공부하는 것도 목회, 설거지하는 것도 목회예요. 새터교회에서 일한 17년간 전 충분히 행복했지만, 목사라는 타이틀로 내가 위치 지어지는 건 한계라고 느꼈어요. 목사나 교회라는 틀로 담아내기에는 훨씬 크고 넓고 깊은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박후임 목사’에서 진안 주민 ‘후임씨’가 된 그는, 하늘과 땅과 바람 그리고 그런 자연을 몸으로 체화한 시골 노인들을 통해 “더 크고 깊고 넓은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듯했다.
불만투성이 소녀, 구로공단 목사가 되다
박후임은 경기도 파주시 금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중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꾸려가는 살림으로는 도저히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을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겉돌았다.
-그럼 뭘 하고 지내셨어요?
“중학교 내내 ‘공부 못하면 공돌이 공순이 된다’는 얘길 들었어요. 선생님이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거죠. 그래서 친구들 볼까봐 낮에는 밖에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 4년이 제 가장 큰 암흑기였죠.”
-그런데 어떻게 신학대학을 가셨죠?
“19살 때, 신비한 경험을 했어요. 새벽기도를 갔는데, 교회에선 맨날 죄인이라고 그러잖아요. 기도를 하면서 ‘난 죄인이 아니야’ 그런 반항을 했는데, ‘그럼 넌 뭐야?’ 하는 내 안의 물음이 일었어요. ‘난 공부 잘하는 애야’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니가 무슨 공부를 잘해? 고등학교도 못 간 것이…’ 하는 자괴감이 곧바로 덮쳐왔어요. 기도하면서 엄청 울었어요. 발가벗고 엄마 뱃속에 동그랗게 웅크린 태아 같은 모습의 나를 봤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닌 너를 내가 사랑해’ 하는 신의 음성을 들었어요.”
전북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자신의 집에서 인터뷰 중인 박후임 목사. 박 목사는 3500평 논밭을 부치며 농사를 짓고, 진안군 귀농귀촌인협의회 회장을 맡아 마을 일을 돕고 있다. 진안/강재훈 선임기자
-기도를 하다가 그런 소릴 들었다고요?
“내 안에서 올라온 소리였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완전히 세상 전체가 바뀌는 것 같았어요. 기도를 끝내고 나올 때 보니 잔디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그때 만난 세상은 완전 해방이었어요.”
고등학교를 못 가도 존재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란 자각을 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거리에 붙은 방송통신고등학교 신입생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이 대학에 가는 나이에, 경기여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고 25살에 서울장신대 야간부에 입학했다. 낮엔 유치원 보모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어렵사리 대학엘 들어갔는데, 정작 졸업 후에는 그토록 기피하던 공단지역으로 가셨어요.
“대학에서 신학연구회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민중신학, 여성신학, 사회과학을 공부했어요. 보니까 이게 다 내 이야기인 거예요. 그동안 내가 아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는 ‘나만의 하나님’이었는데, 신학을 하면서 보니 ‘모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었던 거죠. 대학생활 내내 나환자정착촌에 들어가 4년을 일하고, 졸업 후에 기독여민회 활동을 시작했어요.”
기독여민회는 1986년 ‘예수, 여성, 민중’을 모토로, 가난한 여성과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창립된 초교파적인 여성단체이다. 박후임은 기독여민회 초대 공동대표인 손은하 목사와 함께 1987년 구로공단 근처에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새터어린이집을 개관하고 곧이어 새터교회를 열면서 17년간 여성, 노동자,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예장통합에서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하기로 한 뒤 처음 배출된 여성 목사 9명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17년이나 공들여서 일군 교회를 떠나고 귀농하셨어요?
“내가 목회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어요. 우리가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었는데 그 아이들이 좀처럼 안 바뀌는 거예요. 폭력성향도 강하고. 그러다가 근교에 밭을 임대해서 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주말농사 짓듯이. 처음엔 나무를 꺾고 다 뽑고…. 근데 일주일에 한 번씩 한 3년을 애들이랑 흙 만지고 뿌리고 놀다 보니까 아이들이 바뀌더라고요. 화단을 망가뜨리지도 않고 뭘 부수지도 않고, 애들 마음이 평안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건 교회가 한 일이 아니라 자연이 한 일이죠.”
-자연이 사람을 치유하고 순화시켰군요.
“삶이 갖는 한계, 목회가 갖는 한계, 교회라는 공간의 한계에 갇혀 있을 게 아니라 시골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힘들 때, 땅 밟고 서로 도우며 일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죠.”
귀농을 생각할 무렵, 크리스찬아카데미 공부 모임에서 남편 이재철(46)을 만났다. 나이는 박후임보다 연하였지만 진중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두 사람은 귀농을 결심했고, 2005년 수중에 있던 돈 1000만원을 탈탈 털어 진안으로 내려와 결혼했다. 진안은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고장이었지만, 처음부터 고향처럼 푸근했다. 평균 해발고도 350m의 고원지대여서, 주변의 고봉들이 그다지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유순하고 안온한 풍경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농촌이란 ‘자연’일 뿐이었다. 그 속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조직과 사람에 둘러싸여 일을 해왔던 터라, 좀더 호젓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설렘도 있었다. 큰 착각이었다.
서울 새댁 후임씨의 큰 착각
-뭘 착각한 거죠?
“교회 일을 하면서 난 내가 ‘몸으로 산다’고 믿었어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산다고. 그리고 내가 상당히 공동체적이라고 믿었고요. 그땐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늘 사람들이랑 같이 살다시피 했거든요. 그래서 이젠 좀 자유롭게 살겠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던가요?
“농사를 배우면서 몸으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첨 알았어요.(한숨) 더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내 영역’이라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었어요. 그냥 훅 치고 들어와요. 이웃 할머니가 아침 여섯시에 우리 집 문을 확 열어젖히고….”
-예고도 없이요? 노크도 안 하고?
“그렇죠. 예고 없이.(웃음) 기침 몇 번 하시는 거, 그게 노크죠. 그때까지 자고 있던 걸 들킬까봐 숨죽이고 있으면, 문 열고 들여다보다가 ‘일 나갔나 보네!’ 하고는 가시죠.(웃음)”
-어이쿠!
“그것뿐인가요? 시도 때도 없이 ‘세탁기가 안 된다’, ‘티브이 안 나온다’ 하시죠. 겨울 되면 ‘텔레비전도 없는데 심심해서 어떡하냐?’고 저더러 회관으로 나오라고 하시지…. 진짜, 아! 이거 어떡해? 그런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내 눈에 ‘마을’이 들어왔어요. ‘어, 마을이 있구나!’ 하고. 그건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다시 바라본 농촌은, 멋들어진 자연풍경이 아니라, 고된 노동과 끈끈한 인간관계가 실존하는 새로운 삶의 무대였다. 박후임 부부가 노인학교와 박물관 개관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남편은 영농회장이 되고 새마을지도자가 되어, 요즘 마을 브랜드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고, 농번기 주민과 방문객들에게 저렴한 비용에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마을식당을 전라북도 사업으로 따내서 올해 안 개장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부부는 깊숙하고도 끈끈하게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이젠 현지 문화에 완전히 적응하신 건가요?
“근데 사실은 귀농인만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 마을 분들도 저희 때문에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아요.(웃음) 우리 부부는 늘 붙어 다니는데, 이게 여기선 무척 남사스러운 일이거든요. 교회 가도 남자 자리, 여자 자리 따로 앉는데 우린 늘 붙어 앉으니까요. 제가 재철씨! 재철씨! 하고 남편 이름을 부르는 것도 어른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서로 문화적 충격을 받는 거예요. 지금은 꽤 이해를 해주세요. 이젠 우리 집에 오실 땐, 할머니들도 ‘있나?’ 하고 먼저 인기척을 보내시고. 양쪽 문화가 조금씩 섞이고 있어요.”
-그렇게 마음의 빗장을 허물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죠?
“할머니들이 정 주는 거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어요. 정을 듬뿍 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그분들한테는 큰 상처가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귀농귀촌하려는 분들 상담할 때 3년은 무조건 버티라고 그래요. 그때쯤 되어야 마을에서 땅 매물도 나와요. 할머니들도 간을 보시는 거죠.(웃음) 이 사람이 같이 살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할머니들한테 잘 보여야 되겠네요.(웃음)
“아녜요. 나를 다 내려놓고 희생적으로 들어가면 더 힘들어집니다. 시골에선 ‘주고받음’이 정확해야 돼요. 제가 할머니들이랑 공부를 하잖아요. 그럼 할머니들이 들기름도 갖다 주시고 된장 고추장도 갖다 주시고 이렇게 주고받는 게 있어요. 어느 날 나갔다 오면 마당에 풀이 없어졌어요. 풀을 다 매고 가셨어.(웃음) 일방적으로 주거나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는 오래갈 수가 없어요. 한 번 내가 사면 한 번은 얻어먹어야 돼요. 그분들로 하여금 나한테 뭔가를 줄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동등해지지, 안 그러면 그분들 기가 죽거나 자존심 상해하세요. ‘서로 주고받는 것’이 그분들 일상에선 아주 자연스러워요.”
금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교 진학 못한 ‘암흑기’에
‘너를 사랑해’ 하는 신의 음성
신학대에서 접한 민중신학 속
‘모든 힘든 이들의 하나님’
공단에서 교회 열고 첫 여성목사
삶, 목회, 교회에 한계 느껴 귀농
고된 노동·끈끈한 관계 실존하는
농촌은 새로운 삶의 무대
농사는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의 방법
전북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자신의 집에서 인터뷰 중인 박후임 목사. 오른쪽은 이진순씨. 진안/강재훈 선임기자
나를 도울 수 있도록 곁을 내주는 일
박후임은 2013년 진안군 귀농귀촌인협의회를 만들어, 마을에 새로 들어오는 이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다. 이제 마을 39가구 가운데 18가구가 귀농, 귀촌, 귀향 가구이고 앞으로도 수는 계속 늘어날 추세이다. 외지에서 온 이들 중에는 편집디자이너, 그림 그리는 사람, 국어선생님도 있어서 함께 손발을 맞춰 할머니들 책도 펴내고, 협의회의 소식지 <삼백오십>(고도 350미터란 뜻)도 계간으로 발간한다. 자연농 공부 모임을 만들고, 천연화장품 만들기 모임, 독서 모임도 있고, 영상 모임, 중창단도 만들었다. 마을이 지속가능하려면, 농사짓는 사람만 있어선 안 되고 다양한 직업과 재주를 가진 이들이 모여서 문화와 교육, 복지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박후임 부부의 생각이다.
-귀농을 고려할 때 제일 중요하게 준비해야 할 게 뭔가요?
“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자기에 대한 믿음’이요. 그게 재정적, 물질적 준비보다 중요하다고 봐요. 저흰 돈 없이 왔지만, 오시는 분들은 대개 돈을 갖고 내려와요. 거의 1억에서 1억5천, 퇴직한 사람들은 더 많이 갖고 오죠. 그러곤 그 돈에 발이 묶여요.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우리는, 여기서 땅 파먹고 살아야지 하는데, 그분들은 갖고 온 돈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 생각에 불안한 거예요.”
-근데 요즘 같은 때, 영세농으로 생활비는 벌 수 있는 거예요?
“농사로는 돈이 안 된다고 봐야죠. 씀씀이를 줄이고 다른 방식으로 최소한의 현금을 융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해요. 저희가 처음 하지 감자를 심었는데 꼬박 석달간 땡볕에서 일해 키웠더니 딱 두 박스 나오더라고요.(웃음) 시장에 가보니 감자 상자가 막 쌓여 있는데, 차마 용기가 안 나서 남편더러 값을 물어보라고 했어요. 박스당 만원이래요. 하하하….”
-그럼 달랑 2만원?
“저한텐 너무 충격이었어요. 농사로 돈을 버는 건 아니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인들한테 이메일을 썼죠. 내가 화학비료, 농약, 제초제 안 쓰고 농사를 할 텐데 한 달에 50만~60만원만 있으면 전화세 전기세 내고 살 수 있겠다. 같이 농사를 짓는다 생각하고 내게 매달 2만~3만원씩 후원을 해달라.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모든 농산물은 다 같이 나누겠다고.”
-일종의 협동조합 같은 건가요?
“그냥 식구들끼리 같이 농사를 지어 먹는다는 개념이에요. 우린 ‘더불어식구’라고 이름 붙였어요. 때에 따라 들고 나긴 하는데 스무 가정 정도 유지해요. 더 많아지면 나누는 몫이 작아지니 안 되고요. 그때그때 작물이 나올 때 보내주죠. 식구가 많은 집은 더 보내고, 독신가구는 자기 몫을 다른 집에 양보하기도 하고.”
박후임에게 농사는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라기보다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방법 같았다. 농사를 짓는 것도, 나누는 것도, 먹고사는 것도, 반듯한 계산용지로 하는 게 아니라 해가 뜨고 지는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라 한다. 필요할 땐 도움을 청하고, 여유가 생기면 기꺼이 나누고, 일방적으로 돕는 게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나를 도울 수 있도록 곁을 내주는 일. 그것이 할머니들의 오랜 지혜가 가르쳐준 삶의 섭리가 아닐까. 학선마을박물관 입구의 표어처럼 ‘오래된 길이 미래를 여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시골에 와서 가장 많이 바뀐 건 뭐예요?
“자연의 리듬과 몸의 리듬이 신기하게 닮아가요. 계절에 따라, 낮밤에 따라, 자연 질서에 몸이 따라가는 것 같아요. 여름엔 일이 엄청 힘들거든요. 땀도 엄청 흘리고 기진맥진해서 저녁도 아홉시쯤 먹어요. 그런데도 새벽 5시면 눈이 딱 떠져요. 낮 길이에 맞춰서 몸이 따라가는 것처럼. 반면에 요즘 같은 겨울엔 놀잖아요. 해가 늦게 뜨니 늦게 일어나요. 그런데도 내내 졸려요. 아주 많이 자요.(웃음) 그러면서 머릿속도 굉장히 단순해졌어요.”
옳은 것은 늘 단순하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창밖의 텅 빈 겨울 하늘을 바라보다가 할머니들의 시집에 담긴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나무가 좋아/ 땅이 조아/ 하양 눈 꽃/ 이뿌기도 해//꼬불꼬불 구부러진 계곡/ 그 길을 따라 흘러가는 물/ 그 자연에 물길 풍경이 아름답다.”(정안순 시, ‘자연’)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