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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 그 행복한 기억

등록 2018-08-04 09:45수정 2018-08-04 10:59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이진순의 셀프 인터뷰

5년2개월간 122명 인터뷰
숨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아
최소 4시간, 1박2일 인터뷰도

‘품격 있는 보수’는 못 만났지만
열림의 주인공들은
인생의 교본, 희망의 증거

“완벽한 위인은 없지만
누구나 반짝이는 순간은 있어”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만 5년2개월간 전했다.

<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에서 2013년 5월23일 윤종수 서울북부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2018년 7월21일 예멘 난민 살와까지 5년2개월간 격주로 122명의 인터뷰를 진행한 이진순씨가 2018년 7월26일 오후 마지막으로 자신을 인터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에서 2013년 5월23일 윤종수 서울북부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2018년 7월21일 예멘 난민 살와까지 5년2개월간 격주로 122명의 인터뷰를 진행한 이진순씨가 2018년 7월26일 오후 마지막으로 자신을 인터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일은 매번 두렵다. 익숙한 패턴, 익숙한 습관, 익숙한 관계의 궤도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검은 진공 속으로 뛰어드는 느낌이랄까. 밉든 곱든 오랫동안 서로 부대끼며 적당히 헐거워지고 내 체온과 비슷해진 낯익은 것들을 내려놓고 빈 몸으로 돌아서는 마음은 아쉬움과 미련으로 출렁댄다. 그러나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게 두려운 만큼이나 익숙한 것에 느슨해지는 것이 나는 또한 두렵다.

2013년 6월 ‘이진순의 열림’이란 제목을 달고 처음 인터뷰를 쓰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햇수로 6년, 만 5년2개월간 122분을 격주로 만났다. 매회 설레고 벅찼던 만남의 기록은 손때 묻은 취재노트 17권과 라면상자 네 개 분량의 녹취록으로 남아 있다. 그간 내 개인 신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열림 첫 회를 쓸 때 나는 미국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와 오랫동안 꿈꾸던 새로운 일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열림을 맡은 소감과 포부를 나는 그때 이렇게 썼다.

“미련일까, 몽상일까. 10여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 그토록 그리웠던 옛 친구와 동료들을 만났지만 가슴속 허기는 채워지질 않았다. 내가 시민운동을 하러 돌아왔다고 하면 친구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아직 젊구나. 힘도 좋다.” 자조 섞인 냉소 사이로 좌절의 상처가 내비쳤다. 한때 세상을 뒤집겠다고 낡은 운동화가 해지도록 아스팔트 위를 누비던 청년들이 그들인가. 돌아서는 어깨가 고단해 보였다. 스펙 경쟁과 취업난에 기진맥진한 젊은 세대나, 뒷방 노인네 취급에 격분한 나이 든 세대나 불통의 장벽에 둘러싸여 제각기 외롭고 서글프다. 희망을 찾고 싶었다. 개인적 경험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낯선 것, 새로운 것, 나와 다른 것에 자신을 열어 그 신선한 소통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열린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2013년 6월14일 저작권 공유 운동 윤종수 판사 편 중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소망을 이룬 듯하다. ‘열림’을 통해 내가 만난 한 분 한 분이 내겐 인생의 교본이고 희망의 증거였다. 어떤 이들은 정기적으로 예배를 보거나 참선을 하는 것으로 일상에 지치고 욕망으로 번잡해진 마음을 씻어낸다는데, 나는 격주로 열림의 주인공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용기를 얻고 시시때때로 유약해지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열림의 가장 큰 수혜자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내가 받은 감동과 고통과 희열을 날것 그대로 전하려고 애썼지만, 한 인생의 무게와 깊이를 담아내기엔 내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것이 열림 마지막회를 이진순의 ‘셀프 인터뷰’로 하자는 에디터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한 첫째 이유다. 그간 내가 열림을 통해 만난 분들에 대해서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는 아쉬움 때문에, 미진했던 대목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는데 막상 그걸 다시 글로 쓰려 하니 막막했다. 김종철 선임기자가 총대를 멨다. 그가 내게 질문을 던지면 거기 응답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채워나가기로 했다. 지난달 26일 한겨레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평소 인터뷰어로 열림 주인공들을 만나러 가곤 했던 그곳에 처음으로 질문지 없이 나가 앉았다.

이진순과 인터뷰이들. 1. 김민기 학전블루 대표 2. 고 신영복 교수 3.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 4. 이용마 <문화방송> 해직기자 5.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6. 임순례 영화감독 7. 이진순씨와 필담을 나누고 있는 김승옥 소설가 8. 청소노동자 손경희씨 9.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씨와 함께 살고 있는 장혜영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극히 ‘주관적인’ 인터뷰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열림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도 아쉬움이 큰데, 우선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질문부터… 왜 그만두세요?

“힘에 부쳐서요.(웃음) 지난 수년간 열림을 써왔는데 갈수록 글 쓰는 게 힘들어요.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 더 능숙해질 법도 한데 저는 어떻게 된 건지 시간이 갈수록 시간과 공력이 더 들더라고요. 격주로 나가는 기사지만, 한 주는 자료를 검색해서 질문지 만들고 인터뷰를 하고, 한 주는 인터뷰 녹취록을 보면서 추가 인터뷰를 하거나 추가 자료 조사를 해서 원고를 쓰는데, 그 사이사이 다음번 인터뷰이를 찾기 위해서 인터넷이나 서점을 뒤지고 다니죠. 제가 전업 기자가 아니고 본업이 따로 있다 보니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영락없이 밤샘을 하게 돼요. 이젠 도저히 체력적으로 감당이 안 돼서….”

―이해합니다. 갈수록 글 쓰는 게 어려워지죠.(웃음) 그간 6년에 걸쳐 122명을 만나 인터뷰했는데,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오래 할 걸 예상하셨어요?

“아뇨. 잘릴 때까지만 하자 했는데, 빨리 안 잘라 주셔서.(웃음) 첫 회를 쓸 때 고경태 에디터한테 연거푸 퇴짜를 맞았어요. 원고 초안을 세 번, 네 번쯤 들어엎고 다시 썼죠.”

―수습 기간이 좀 빡셌네요.

“제가 이런 식의 지면 인터뷰를 써본 적이 없어서 다른 분들이 쓴 인터뷰를 스크랩해서 질문답변과 기자의 설명글 비중이 7 대 3인지 6 대 4인지 따져보기도 하고… 근데 여러 번 퇴짜 맞으면서 한가지 배운 게 있어요. 아, 그냥 내가 끌리는 대로 쓰자.(웃음)”

―그냥 끌리는 대로?

“저널리즘 교수로 있을 때 학생들한테 늘 했던 이야기가 ‘기사에 절대적 객관성이란 건 없다. 쓰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프레이밍(선택적 기술) 된다’는 거였거든요. 내가 만난 인물에 대한 얘기는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서 조명되는 거고, 여기 객관성을 부여하는 건 필자가 물리적 중립성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어떤 주관과 선입관을 가진 사람인지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얻어지는 거라고요. 그래서 열림에는 ‘나’를 주어로 하는 일인칭 화법이 많이 쓰여요. 내가 가진 평소 생각, 내 궁금증과 기대감 같은 걸 대놓고 얘기하죠. 난 이런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이렇게 보이더라….”

―그게 롱런한 비결일 수 있겠네요. 꽤 긴 글인데 가독성이 높았어요.

“인터뷰어로서 지면을 두 개 면이나 쓸 수 있었다는 건 큰 행운이지요. 그 정도 분량으로 원고를 실을 수 있다는 걸 전제로 더 길게 여쭤보고 더 길게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초반에는 한 면 조금 넘게 하다가 두 개 면으로 늘어났잖아요. 길면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는데 독자들 반응이 좋으니까 지면을 늘린 거죠.

“전 인물 탐사를 위한 인터뷰는 단순한 큐앤에이(Q/A)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질문/답변으로만 고스란히 옮긴다면 굉장히 건조할 거예요. ‘고향이 어딥니까?/어딥니다’ ‘직장은 어떻습니까?/어떻습니다.’ 근데 우리가 선보는 상대에 대해서 가지는 인상은 질문에 대한 답변 자체가 아니라,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상대가 바로 답을 하지 않고 먼 산을 봤다든가, 찻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든가 그런 데서 더 많은 정보를 얻잖아요. 제가 인터뷰이의 답변에 말없음표를 넣는다거나 난감해하는 표정이나 리액션을 기술하는 건 제가 그분과 만났을 때 느낌을 가급적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제가 예전에 다큐멘터리 작가였기 때문에 그런 비주얼한 요소들을 글로 옮기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한의사 고은광순씨(왼쪽)가 2015년 10월14일 낮 충북 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솔빛한의원 거실에서 인터뷰를 위해 찾은 이진순씨(오른쪽)와 함께 점심상을 차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옥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의사 고은광순씨(왼쪽)가 2015년 10월14일 낮 충북 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솔빛한의원 거실에서 인터뷰를 위해 찾은 이진순씨(오른쪽)와 함께 점심상을 차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옥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악명 높은 인터뷰어?

―인터뷰이 선정은 어떻게 했어요?

“그 역시 마음 끌리는 대로.(웃음) 근데 나중에 돌아보면 열림에서 만난 분들에게 어떤 공통점은 있는 것 같아요. 첫째는, 일단 좋은 분들이었고요.”

―그래요. 어디서 이런 좋은 분들을 찾아낼까 궁금했어요.

“그게 저한텐 중요했는데 제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최소 2주, 길게는 한달 이상 그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준비하는데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생각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잖아요.(웃음) 둘째로, 제가 만난 분들 가운데 염세적이거나 비관적인 분은 거의 없어요. 제가 아마 반복적으로 했던 질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믿으세요?’라든가 ‘세상은 그래도 변할까요?’ 같은 물음일 거예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있고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세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것이라고 희망을 주고 위안을 주는 분들을 내심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 선생은 인터뷰를 오래 하는 걸로 악명이 높아요.(웃음) 최소 4시간, 김민기 선생 같은 경우는 밤을 새워서 1박2일로 하기도 했다고요.

“밤을 새우기도 하고, 그런 밤샘을 두 차례씩 하기도 하죠. 이국종 교수 때도 그랬고요. 자기 인생을 낱낱이 까발려서 생면부지의 남 앞에서 얘기하는 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성가신 일이겠어요. 그래서 얘기할 때는 몰랐다가 끝나고 허탈해져서 앓아누웠다는 얘길 종종 들었어요. 이 기회를 빌려 죄송하단 말씀 드리고 싶어요. 인터뷰가 길어진 건 제가 묻기도 많이 묻지만 웬만해선 얘길 끊지 않고 들어서 그래요. 그래서 녹취록으로 옮기면 A4 용지로 70~80장, 많게는 100장이 넘을 때도 있어요.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적어달라’고 해서 녹취하시는 분들도 저 때문에 무척 고생하셨죠.”

―황석영 선생이 열림 인터뷰를 하고 난 소감을 쓰면서 ‘이진순은 어느 결에 황석영의 내면에 틈입했다가 나갔다’고 하셨던데요. 따로 깊숙이 얘기를 꺼내는 비법이 있어요?

“무슨 비법이 있겠어요.(웃음) 그냥 잡담을 많이 해요. 음식 얘기, 여행 얘기… 제 얘기도 많이 하고요. 실패한 연애 얘기도 하고 사춘기 아이 때문에 속 끓이는 얘기도 하고.”

―그런 건 원고에 안 들어갔잖아요.

“아, 들어가면 큰일 나죠.(웃음)”

―자기 얘기를 먼저 털어놓는 게 상대 마음을 여는 데 도움이 되겠군요.

“꼭 의도하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누구든 인생에서 공개하고 싶지 않은 대목이 왜 없겠어요. ‘나는 그게 궁금한데 답하고 싶지 않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할 때도 있고요. ‘원하지 않으시면 쓰지 않겠습니다. 근데 저한텐 얘길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할 때도 있어요. 곧이곧대로 지면에 싣지 않더라도 제가 그분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죠.”

열림에서 못다 한 이야기

―122분 가운데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 분으론 누굴 꼽을 수 있을까요?

“한 분 한 분과의 만남이 제겐 모두 소중한 기억이에요. 따로 누굴 뽑을 순 없고요. 음… 인터뷰 자체를 진행하는 게 쉽지 않아서 특히 고민이 많았던 경우는 있죠. 예를 들면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선생님은 말씀을 아예 못 하시니까, 필담으로 인터뷰를 해야 해서….”

―아, 그랬죠.

“필담도 문장으로 쓰시는 게 아니에요. 단어와 단어, 화살표, 그렇게 부호처럼 쓰시면 제가 그걸 옆에서 문장으로 ‘이래이래서 이렇다고요?’ 묻고, 거기에 ‘응, 아니’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식이었거든요. 그래서 이걸 글로 잘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이었고요. ‘아침이슬’의 김민기 선생님은 세간의 호기심 대상으로 소개되는 걸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라 방어의식이 강하셨고 그러다 어느 순간 술이 돌면 감정 돋친 표현을 쓰기도 하셔서, 저분이 말씀은 저렇게 하지만 속으론 어떤 생각일까 한 꺼풀 더 들어가야 하는 경우라서 쉽지 않았죠. 이국종 교수도 겉으론 위악적이거나 냉소적인 표현을 많이 쓰지만 속마음은 여리고 뜨거운 분이라 길게 얘길 들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분이었고요. 신영복 선생님은 항암치료 받고 잠깐 상태가 좋아지셨을 때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는 그렇게 금방 돌아가실 줄 몰랐어요.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 다시 글을 쓰려니, 저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 마음을 추스르고 쓰기가 쉽지 않아서 좀 힘들었어요.”

―그간 열림에 대한 독자들 반응이 뜨거웠지만 전 그중에서도 채현국 선생 인터뷰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인터뷰 기사로는 이례적으로 수천건의 댓글이 폭주하고 에스엔에스(SNS) 공유도 몇만건을 넘어서 사회적인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죠.

“처음 그분을 뵌 게 2013년 12월이에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 속을 달리는 기분이었어요. 극우단체 노인들이 ‘종북척결’을 외치면서 가스통에 불을 붙여 굴리고, 김기춘을 비롯한 유신시절 올드보이들이 대거 중책을 맡으면서 역사의 시침이 30년 전쯤으로 퇴행하는 것 같았죠. 정신적으로 의지할 만한 어른들도 많이 돌아가신 상태였어요.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박경리, 박완서, 리영희 선생… 이럴 때 정신 번쩍 들게 야단쳐줄 어른은 안 계실까. 그러다가 채현국 선생님을 뵙게 되었어요. ‘저런 가스통 할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노인 세대 입장에서 얘기 좀 해주세요’ 하니까 ‘절대로 봐주지 마라. 그 노인네들이 잘못된 거다. 근데 너희도 까딱하면 저렇게 되니 정신 바짝 차려라’ 그런 말씀이 죽비처럼 가슴에 와서 꽂혔죠.”

―일반인에겐 거의 안 알려진 분이셨는데 그런 분을 발굴해서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셨어요.

“‘발굴’이란 말은 가당치 않고요.(웃음) 안도현 시인이 <한겨레>에 쓰신 짧은 칼럼에 그분 일화가 언급된 적 있고 몇몇 원로분들의 회고록에도 그분 이름이 등장한 적 있어요. 사실 제가 특종처럼 새롭게 밝혀낸 건 별로 없어요. 2회에 걸쳐 실은 김민기 선생 인터뷰를 기억해주시는 분도 많지만, 사실 오래전 1986년에 김창남 교수가 엮은 <김민기>란 책에서 비슷한 내용이 담기기도 했거든요. 시기적으로 이런 분들 이야기에 목이 말랐던 때라서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샀던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은 꼭 인터뷰해보고 싶었는데 못했다’ 아쉬운 분들은 없어요? 카드를 세 장 쓴다고 하면 누굴 쓰겠어요?

“우선 <제이티비시> 손석희 사장님은 ‘현직에 계신 동안은 어렵겠지만 퇴직하게 되면 첫 인터뷰는 제가 맡아 놓습니다’ 해서 억지로 구두 약속을 받았는데, 제가 먼저 그만두게 되어서 아쉽고요.(웃음) 김영란 전 대법관님도 특정 현안에 대한 인터뷰 말고 그분 인생에 대해 더 폭넓은 얘길 듣고 싶었어요. 그분 강연을 들었는데 ‘피선출자가 선출자(유권자)보다 현명하고 똑똑할 것이란 환상을 깨야 한다’는 책의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엘리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쓰시는 책 출판되면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못하고 그만두네요.”

―저한테 기회를 넘기시죠.(웃음)

“하이고, 제가 넘겨드리고 말고 할 처지가 못 돼서요.(웃음) 김훈 작가님은 섭외를 위해서 몇번 뵈었는데 술만 먹고 결국 승낙을 못 받았어요. 김훈 선생님이 농담처럼 말씀하시는 ‘보수삼락’이란 게 있는데….”

―보수삼락?

“보수의 세 가지 즐거움이요. 첫째는 자식을 낳아 국방에 종사하게 한다. 둘째는 돈을 많이 벌어서 세금을 많이 낸다. 셋째는 법과 규칙을 잘 지켜서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데 이바지한다.(웃음) 그래서 김훈 선생님은 안 하시더라도 그런 보수삼락에 동의할 만한 다른 분은 없을까 눈이 빠지게 찾았는데, 제 깜냥으론 도저히 못 찾겠더라고요. ‘품격 있는 보수’를 만나보고 싶단 꿈은 못 이뤘어요.”

이진순씨가 7월2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9층 옥상정원에 앉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진순씨가 7월2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9층 옥상정원에 앉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당신에게도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이번에 그간 열림에 실렸던 122명 가운데 12명을 골라서 책으로 출간하시죠? 제목이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문학동네 출간)이라고요.

“한 가지 해명하고 싶은 게 있는데 12명을 선정한 건 제가 아니에요. 제가 도저히 가려내질 못하겠다고 하니 출판사에서 뽑은 건데 122명 모두를 담지 못한 게 저로선 너무 안타깝죠. 열두 분에 대해선 그간 지면 제약 때문에 못다 한 얘기, 추가로 인터뷰한 얘기들을 더 담았어요.”

―그간 열림에서 인터뷰했던 분들도 그렇고 이번 책에 실린 분들도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경우가 많아요. 책에 소개된 첫 인터뷰도 고 김관홍 잠수사의 부인인 김혜연씨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열림을 쓰면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그간 만난 분 가운데 제일 훌륭한 사람, 안팎이 똑같이 존경스러운 사람이 누구냐?’는 거였어요. 제가 책 서문에 쓴 얘기인데, 그럴 때마다 제 대답은 ‘아무도 그렇게 훌륭하진 않아요. 그렇게 완벽한 위인은 없어요’란 거였죠. 누구에게나 내밀한 상처가 있고, 그게 흉터로 남아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해요. 사람은 누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심하고, 비루하고, 망설이고, 주저하고, 우물쭈물하고, 후회하죠. 그러다가 어떤 인생의 고비를 만나거나 결정적 순간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에너지가 확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크리스마스트리의 점멸등처럼 꺼져 있다가 잠깐 반짝, 또 꺼졌다가 반짝하는 작은 불빛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멀리서 보면 하나의 큰 횃불처럼 보이는 것이지, 어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꺼지지 않는 성화 같은 횃불을 들고 와서 세상을 밝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열림을 통해 많은 분들을 뵈면서 가졌던 생각이에요.”

―그래서 제목이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이군요.

“네. 어떤 분은 ‘굉장히 훌륭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인간적이더라’ 그래서 실망하거나 한 적은 없어요. 누구든 크게 다를 리 없잖아요. 나와 큰 차이 없이 희로애락과 두려움과 망설임, 주저함을 가진 평범한 분들인데, 그분들이 길을 잃을 때마다 어떤 힘으로 다시 자신의 빛을 밝히려고 했는지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정직하고 감동적인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누구에게나 한 방은 있다, 당신도 반짝할 때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비뚤비뚤한 개인들의 거대한 힘

―난 대학 때부터 간간이 이 선생을 봐왔지만 오늘처럼 본격적으로 얘길 나눈 적은 없는데, 옛날에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앗, 불길한데… 예전 이미지는 어떤 건데요?”

―뭐… 강인한 투사 같은?(웃음) 학생운동 전사였죠.

“강인하긴요! 제가 콤플렉스가 강해서 어려서부터 센 척을 한 거예요. 전 최루탄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랐는데 그거 되게 모양 빠지잖아요.(웃음) 그래서 시위가 있는 날엔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껌을 질겅질겅 씹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들이 그래요. 그때 무지 강단 있어 보였다고. 다 속은 거죠.”

―그래도 총여학생회장도 하고 감옥도 가고 노동운동도 하고 그랬잖아요.

“피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핑계 대고 피하려고 했어요. 나도 가난한 집 소녀가장답게 가족들 부양이나 해야지. 근데 그렇게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9시 땡!’ 하면 뉴스에 ‘전두환 각하께서는…’ 하는 ‘땡전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아, 망했다! 저 얼굴만 안 봐도 도망갈 수 있었는데.(웃음) 전 인간의 소심함과 안일함, 용감함과 담대함이 배타적인 카테고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든 80%는 소심하다가 아주 가끔 용감해지고, 80%는 이기적이다가 아주 가끔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죠. 그 가끔 터지는 에너지가 어느 순간 발화할 때 그게 서로에게 감동을 주고 연쇄반응처럼 다른 사람들을 움직여요. 저도 그 어느 연결고리에서 연쇄반응의 한 접점이 되었을 수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비영리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이죠. 와글은 뭐 하는 뎁니까?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가진 차세대 청년 리더들을 정파와 무관하게 양성하고 지원하는 곳이에요. 이번 지방선거에서 와글 캠프 참가자 28명 중에 7명이 출마해서 3명이 당선되기도 했어요. 보통사람들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온라인 시민참여 플랫폼을 기획하고 운영하기도 하고요.”

―운영자금은 어디서 나와요?

“후원금이요. 지금도 열심히 후원자 구하러 다녀요.(웃음)”

―과거나 지금이나 정치적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죽 해왔는데 직접 정치에 나설 생각은 없어요?

“없어요. 그럴 깜냥도 안 되고요. 지금 저희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기여는, 적당히 물러나 주면서 젊은 세대들이 기존 정치 문법에 구애받지 않는 신선한 상상력으로 새판을 짜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활동할 공간을 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교수 생활 하다가 한국에 돌아온 건 이런 일을 하려는 거였어요?

“네. 제가 마흔 넘어 유학을 가서 공부한 게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 정치혁신운동이에요. 과거 80년대 운동 방식으로는 도저히 길이 없다고 낙담했는데 그럼 대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싶었죠. ‘조직 없는 멤버십’ ‘리더 없는 리더십’ 같은 새로운 디지털시대의 운동 양태에 대해서 처음엔 굉장히 감정적 반발이 컸어요. 그런 게 어딨어? 그게 말이 돼? 치열한 현장운동 경험도 없는 서양 연구자들이 한가한 소릴 하고 있다는 반감이 컸어요.”

―근데 생각이 바뀌었나요?

“촛불집회가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보면 명확하잖아요. 정당도 시민단체도 이런 근본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지 않아요. 전혀 새로운 주체들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죠. 세상을 바꾸는 건, 비범한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비뚤비뚤하고 거칠고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유동적이고 거대한 연계라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으로 와글을 만들었고, 그런 생각으로 열림을 썼어요. 아마 20년 전의 저에게 인터뷰를 맡겼다면 우리 사회 오피니언 리더나 각계 원로들을 찾아다니는 식으로, 지금까지의 열림과는 전혀 다른 글을 썼을지도 몰라요.(웃음)”

123번째 열림의 마지막 인터뷰는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세상에서 해석하기 가장 난해한 존재는 역시 자기 자신인 것 같다. 그간 열림을 빛내주신 122분의 주인공들과 거친 글을 열린 마음으로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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