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위주의 투쟁에서 ‘오월 광주’의 여성들은 그동안 항쟁에 대한 기여뿐 아니라 피해규모까지도 상당부분 가려져 왔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차량 위에서 거리방송을 하고 있는 모습들.
“새삼시럽다. 우리가 지금껏 말을 안 혔겄어. 전체 투쟁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우리 얘기만 내세우질 못한 거지.” 윤청자 5월민주여성회 부회장은 “왜 그동안 여성들의 피해를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잘라 말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집단성폭행을 당한 사람은 ㅇ씨만은 아니었다. 광주 시민단체에선 집단성폭행을 당한 뒤 자살한 ㄱ씨의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ㅇ씨나 ㄱ씨의 가족들은 모두 취재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밖에 다른 성폭력 피해 여성들도 가족들의 반대로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1990년, 5·18이 일어난 지 10년 뒤에야 학자와 법률가, 시민단체 활동가들로 구성된 오월여성회는 광주항쟁 때 여성 피해자들의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나온 책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엔 광주항쟁으로 인한 육체적·심리적 피해와 후유증,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가정과 사회의 억압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계엄군인들의 오발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여성 ㅎ씨의 경우, 그 남편은 처음에 상처 입은 아내를 보살피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해 부인을 때리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때 대검에 찔리는 부상을 입은 ㄱ씨는 무직인 가장을 대신해 노동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광주 청문회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던 한 여성은 가족들로부터 “가정주부가 살림이나 할 것이지 왜 나대느냐”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여성의 범죄 피해 사실을 ‘집안의 수치’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1980년 5월에 벌어진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5·18 유공자·피해자로 보상받은 여성은 300여명이지만 실제 피해 여성은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10년 전 광주 피해 여성들의 사례를 기록했던 이춘희 광주 북구 여성인력개발센터 관장은 “성폭력을 당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피해자들도 있었지만 차마 캐묻지 못했다. 당시 우리 사회에선 성폭력 피해를 밝히면 더 큰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께 참여했던 이경순 전남대 명예교수도 “광주민주항쟁에서 여성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던 것만큼이나 피해 사실도 축소돼왔다.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가 여성 피해자들도 5·18의 주변인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여성에 대한 국가 폭력이 은폐돼온 과정은 광주민주항쟁과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백희정 광주나비 대표는 “무엇보다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의 구체성과 피해 정도를 중요한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국가가 저지른 성폭력에 대해서도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그런 일을 당했는지 피해 여성들에게 입증하라고 한다. 광주의 여성 피해자들도 그런 수많은 2차 피해를 당했을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안전하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별도로 조사하는 특별조사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