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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녀의 몸에 새겨진 제주4·3의 기억

등록 2018-10-23 15:19수정 2018-12-28 13:25

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2부 ③
강정마을 12살 소녀에 가한 서청 출신 군인들 고문
3살 위 언니는 법환지서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받아
오빠는 행방불명…어머니는 자매 앞에서 총살돼
“고양이만 보면 그때가 떠올라 지금도 몸이 떨려”

집으로 돌아가는 정순희씨.
집으로 돌아가는 정순희씨.
“고팡(소규모 식량 창고)에 있는 곡식을 먹으려고 쥐들이 들락거리잖아. 그걸 본 고양이가 내 등을 밟고 ‘파다닥’하면서 쫓아.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고팡에 있는 것도 겁이 났지만, 내 몸 위로 쥐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게 더 무서웠어. 혼자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었지.”

지난 20일 정순희(82)씨를 만나러 제주올레 7코스에 있는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찾았다. 지난 5월에 이어 두번째 방문이었다. 정씨는 마당의 나뭇가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제주4·3이 일어난 1948년 당시 12살 소녀였던 정씨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공포스런 고문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산다. 작은 오빠 정동호(당시 17)를 찾아내라며 집을 포위한 군인들이 작은 언니는 인근 법환지서로, 정씨는 강정초등학교로 끌고 갔다. 정씨는 학교 앞 초가의 고팡에 구금됐다. 10평도 채 되지 않은 초가의 안방에는 서북청년들로 구성된 군인들이 묵고 있었고, 다른 방은 고문실이었다. 이들은 “오빠를 숨겨두고 너희 자매가 음식을 갖다 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정씨에게 모진 고통을 가했다.

12살 소녀에게 물고문·전기고문까지

“두꺼운 끈으로 다리와 허리, 가슴과 팔을 결박하고선 문짝에 다시 묶어. 그리고는 거꾸로 세워놓고 바닥에 콱콱 찍어. 머리가 어떻게 되겠어?” 정씨가 자신의 정수리를 매만지며 “그때 머리가 빠져 여기가 다 벗겨졌다”고 했다. 그들은 주전자에 담아온 물을 정씨의 코와 입으로 마구 들이붓기도 했다.

당시의 기억에 북받친 듯한 정순희씨.
당시의 기억에 북받친 듯한 정순희씨.
“물을 들이마시다 보면, 이제 죽는구나 싶을 만큼 숨이 막혀. 바른말 하라며 쇠꼬챙이를 이 사이에 집어넣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해. 그때부터 오랫동안 이 두 개 없이 살았어.” 치아를 보여주며 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정씨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것도 좋아. 물을 들이켜 배가 차오르면 배를 콱콱 눌러. ‘컥’하고 숨이 넘어가지. 그 다음에는 양동이에 물을 길어다 와락 끼얹어. 그러면 ‘추물락’하며(깜짝 놀라) 깨어났어.”

군인들은 어린 소녀의 몸에 전기고문까지 했다. “그것도 좋아. 댓가지에 쇠붙이를 매달아서 다리를 콱콱 찔렀어. 그러면 ‘찌르륵 찌르륵’했어. 다리에 고름이 좔좔 흘렀지. 가슴과 어깨도 찔러서 부풀어 오르고 말이야.” 정씨는 ‘그것도 좋아’라는 말을 반복했다. 점점 강도를 높인 고문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1948년 겨울, 제주에는 유독 많은 눈이 내렸다. 고문에 늘어진 정씨가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고팡 틈새로 바라본 바깥은 온통 하얀 눈에 덮여 있었다. 추위는 정씨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고문을 가하는 이들은 추운 겨울에도 정씨를 젖은 홑옷 차림으로 방치했다. 먹을 것이라곤 하루에 한 번씩 던져주는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밥 한 덩어리가 전부였다. 법환지서에 끌려간 세 살 위 언니도 비슷한 고문을 당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정씨 자매가 끌려간 것은 1948년 11월21일 인근 중문리의 도로변 정비작업에 동원되어 나간 중학생 오빠가 서청 군인들에게 구타당하고 총을 맞은 뒤 행방불명된 직후였다. 정씨는 “오빠와 비슷한 또래 5명이 트럭에 탔는데 한 아이가 이런 차를 처음 타 본다며 웃으니까, 비웃는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때렸다고 해. 우리 오빠가 ‘아이들이 웃을 수도 있지 않으냐’고 말리자, 군인 여러 명이 ‘넌 뭐냐’며 오빠를 총 개머리판으로 마구 두드려 팼대. 중문의 한 냇가에 이르러 오빠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쏘았다고 해. 그 뒤로는 오빠를 보지 못했지.”

정씨는 오빠와 같이 트럭에 탔던 ‘웃은 아이’가 나중에 찾아와 “나 대신 죽었다”며 얘기해줘 그때 상황을 알게 됐다고 한다.

정순희씨가 당시 밧줄에 묶일 때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정순희씨가 당시 밧줄에 묶일 때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정씨는 “주민 한 사람이 우리 자매가 오빠를 숨겨두고 먹을 것을 갖다주고 있다며 거짓 고자질하는 바람에 그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정씨는 군인들에게 고자질한 주민과의 대면을 요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오빠의 행방을 이야기하지 않자 군인들은 그 주민을 초가로 불렀다. 정씨는 그에게 달려들어 “오빠가 보고 싶다. 어디 있느냐. 알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군인들은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라”며 때리자 그는 ‘잘못 본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고 한다. 얼마 뒤 정씨 자매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지만, 서청 군인들은 이들 자매를 ‘폭도 새끼’라고 손가락질하며 동태를 감시했다. 며칠이 지난 1948년 12월16일, 서청 군인들은 정씨의 어머니와 정씨 자매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을 학교 서쪽 매모루동산으로 끌고 갔다. 그때 다가오던 한 군인이 “아이들은 죄가 없다. 너무 하는 거 아니냐”며 정씨 자매의 손을 잡고 나오게 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생환했다.

고문 후유증에 중단한 해녀 생활

“갇혀 고문받는 동안에도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다”는 정씨에게 어머니(당시 54)와의 인연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폭도가족이라며 사람들을 세웠어. 똑바로 눈 뜨고 보라면서 총을 쏘는 거야. 우리 눈앞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정씨의 집에서 50여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매모루동산은 수풀만 무성했다.

12살 때의 고문의 기억을 말하는 정순희씨.
12살 때의 고문의 기억을 말하는 정순희씨.
언니의 고통도 컸다. 정씨는 “언니가 나보다 세 살 위여서 나보다 모질게 고문받았다. 나와 말을 맞출까 봐 다른 곳으로 끌려갔던 언니는 나중에 그때 이야기만 하면 누가 잡아갈까 봐 말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언니는 정씨에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온갖 일을 당했다”고만 했을 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뒤 정씨의 삶은 팍팍했다. 20살 때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려고’ 군에서 갓 제대한 동네 청년과 결혼해 억척스럽게 살았다. 17살 때 배운 물질로 훗날 집도 지었다. 물질을 해 거둔 해산물을 등에 지고 시장에 내다팔고, 채소, 계란장사 등 안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물에 들어가면 온몸이 쑤셨고, 나오면 경련이 심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물질도 오래 하지 못했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아 두 차례나 수술했고, 왼쪽 눈도 한 번 수술했다.

강정초등학교 입구에는 기념비 3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1964년 2월 주민들이 세운 ‘육군 소령 서봉호 기념비’다. 뒷면에 1948년 학교 건축 때 도움을 줬다고 적혀 있다. 제주도교육청이 펴낸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2014)에는 “당시 제주지구 계엄사령부 중문 파견대장이었던 서봉호 소위가 (교실 신축사업의 어려움을) 알고 부하 사병들을 동원해 경비하게 해 한라산의 나무를 베어올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해 겨울 강정마을에서는 많은 주민이 군인들에게 희생됐다. 강정마을회가 펴낸 <강정 향토지>(1996)에 이름이 나온 희생자만 94명이다. 매모루동산 등 세 곳에서만 59명이 집단학살됐다.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정초등학교에 세워진 ‘육군 소령 서봉호 기념비’.
강정초등학교에 세워진 ‘육군 소령 서봉호 기념비’.
물과 쌀이 좋아 ‘제주에서도 제일 간다’는 뜻의 ‘(제)일 강정’이라고 불렸던 강정마을 주민들은 4·3의 회오리가 몰아친지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갈등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밤에 누우면 그놈들이 생각나”

지난 5월26일 정씨는 제주4·3평화재단이 주는 ‘제주4·3어버이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씨는 4·3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장애 인증을 받기 위해 진단서를 발급받기 위해 병원에 갔으나, 상처가 70년 전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며 발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에 누우면 지금도 어릴 때 한 달 가까이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눈 감으면 쥐와 고양이가 파들락 거리는 것이 생각나고, 그놈들이 생각나. 지금도 고양이가 마당에 어슬렁거리면 섬뜩해서 물을 갖다가 지쳐(끼얹어). 음식물도 밖에 놔두질 않아. 고양이가 올까 봐.”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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