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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학살 유해 속 4·3의 원혼…아들 채혈로 74년 만에 확인

등록 2023-09-25 18:27수정 2023-09-25 22:15

2020년 9월 22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가족들과 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유해발굴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대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20년 9월 22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가족들과 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유해발굴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대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74년의 세월이 걸렸다. 김한홍(당시 26살)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갓 난 아들을 두고 떠나야 했다. 1949년 1월17일 제주읍 조천면 북촌리에 들어온 군인들이 마을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동네 삼촌(이웃)들이 죽어가던 날, 김씨의 할아버지도 희생됐다. 김씨는 학살의 현장을 피해 이 들판 저 들판에서 숨어지냈다. 그달 말 ‘군에 와서 자수하면 살려주겠다’는 소문을 듣고 자수했지만 제주읍내 제주 주정공장 수용소에 수용됐다. 그 뒤 고향에 남은 가족들은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김씨는 5개월여 지난 같은 해 7월4일 군사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송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육지 다른 형무소에 수용됐던 4·3 행방불명자들과 마찬가지로 김씨도 행방불명됐다.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도는 대전 골령골 발굴 유해 유전자 감식 시범사업을 통해 4·3 당시 행방불명된 고 김한홍씨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신원이 확인된 4·3 희생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역인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발굴된 1441구의 유해 가운데 1차 시범사업으로 유전자 감식을 실시한 70구 가운데 1구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이뤄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단원들이 2020년 10월 23일 장작더미처럼 쌓인 채로 발견된 희생자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대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이뤄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단원들이 2020년 10월 23일 장작더미처럼 쌓인 채로 발견된 희생자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대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대전 골령골은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 사이에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형자와 대전·충남지역에서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이 군·경에 집단학살돼 암매장된 곳이다. 지난 2007년부터 지금까지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1441구의 유해가 발굴됐고, 발굴된 유해들은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돼 있다. 제주 출신 재미교포로 예비검속 희생자의 유족인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존소(NARA)에서 찾아낸 대전 골령골 학살장면이 담긴 사진은 당기 상황을 보여준다. 대전형무소에 수형 생활을 하다가 집단학살된 제주도민은 298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번 유해 신원 확인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고인의 유해는 2021년 발굴됐다. 고인의 아들은 2018년 제주도내에서 발굴된 4·3 희생자 유해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족들을 대상으로 채혈하는 데 참여했다. 아버지가 제주도 내 행방불명자가 아닌데도 채혈에 참여한 것이다. 최근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된 골령골 학살터 유해와 유전자가 일치돼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하게 됐다. 손자까지 채혈해 신원을 추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던 김씨가 한 줌 재가 돼 고향으로 돌아온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다음 달 4일 유가족, 4·3유족회,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행정안전부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계절차를 거쳐 유족회 주관으로 제례를 진행한 뒤 유해를 화장해 5일 제주로 봉환할 예정이다. 김씨가 고향 땅을 다시 찾고 그리운 가족을 만나는 데 선고받은 형량보다 10배의 세월이 더 걸린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들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김씨의 며느리와 손자, 오영훈 제주도지사 등 관계자들이 제주공항에서 직접 유해를 맞이하고 유해봉환식과 신원확인 보고회를 연다.

한국전쟁 발발 뒤인 1950년 9월23일 헌병들이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전 산내면 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한 현장 사진. 민간 청년단원들이 구덩이의 주검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전쟁 발발 뒤인 1950년 9월23일 헌병들이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전 산내면 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한 현장 사진. 민간 청년단원들이 구덩이의 주검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도는 지금까지 제주공항에서 발굴된 4·3희생자 유해 등 모두 413구를 발굴해 이 가운데 도내에서 141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번 도외지역 유해 1구의 신원이 확인됨에 따라 신원이 확인된 행방불명 4·3희생자는 모두 142명으로 늘어났다. 4·3평화재단과 도는 대전 골령골 발굴 유해에 대한 희생자 유전자 감식 사업을 추가로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에 진행된 골령골의 유해 신원확인은 모래사장에서 반지를 찾는 것만큼이나 기적 같은 일로 평가된다. 또한 다른 지방에서 행방불명된 4·3 희생자의 유해가 확인됨으로써 다른 지방에 대한 신원확인 작업의 필요성과 함께 4·3의 비극성이 다시 한 번 조명받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유해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가족들의 채혈이 필요하다. 현재 대전지역에서 행방불명된 4·3희생자 유족의 채혈이 50%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오영훈 지사는 “대전 골령골 발굴 유해에 대한 유전자 감식과 제주4·3 유해 발굴 및 유전자 감식사업의 연계를 지속해서 요구해왔다. 이번에 도외지역에서 행방불명된 4·3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게 돼 뜻깊다”며 “광주, 전주, 김천 등 도외지역의 행방불명자 신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감식사업도 다른 지자체 등과 협업을 통해 더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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