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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처형장 끌려가던 엄마는 주먹밥을 내게 건넸다

등록 2018-11-02 17:32수정 2018-11-02 20:26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 ④┃정방폭포, 그 속에 감춰진 피울음
4·3으로 온 가족이 해체된 김복순씨 가족사
처형장으로 가던 부모가 준 주먹밥 잊지 못해
오빠는 형무소에서 병사…남은 가족들 흩어져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로 베개가 다 젖어”
김복순씨가 제주4·3 당시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김복순씨가 제주4·3 당시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1949년 1월27일.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이었다. 서귀면사무소 부근 수용소에 갇혀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아버지(김이수)와 어머니(박순여)를 복순(당시 12살)과 복남(당시 8살)은 울면서 쫓아갔다. 부모들 손에는 식은 주먹밥이 들려 있었다. 군인들은 큰 소리로 우는 동생이 시끄럽다며 개머리판으로 내려쳤다. 왼쪽 눈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복순은 피 흘리는 동생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동생은 얼마 안 가 후유증으로 실명했다.

제주4·3 당시 정방폭포 주변은 울음의 바다

“아버지가 ‘이제 가면 죽을 텐데 우리가 이것을 먹어 무엇하겠느냐’며 복남이에게 주먹밥을 건넸어. 나는 어머니를 붙들고 ‘나도 같이 갈래. 어머니가 죽으면 같이 죽겠다’라고 매달렸지. 어머니는 ‘너희는 괜찮을 테니 내 말을 들으라’며 나한테 주먹밥을 줬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김복순(82·서귀포시 서홍동)씨는 69년 전 부모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끔 그 길을 지나다 보면 주먹밥을 쥐여주고 정방폭포 쪽으로 끌려가던 두 분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해.”

아버지는 입고 있던 미녕(‘무명’의 제주어) 두루마기를 접어 딸에게 건넸다. “어디 가서 몸뻬(일바지)라도 만들어달라고 해서 네가 입어.” 김씨는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지어준 두루마기였는데, 그걸 죽으러 가던 아버지가 내게 준 것”이라고 했다.

정방폭포 위에 있는 건물들이 제주4·3 당시 전분 공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서복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정방폭포 위에 있는 건물들이 제주4·3 당시 전분 공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서복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날 수용됐던 주민들은 정방폭포 근처로 끌려갔다. 당시 서귀면사무소에는 대대본부(2연대 1대대)가 설치됐고, 현재 서복전시관이 들어선 곳에 있던 전분 공장은 수용소로 사용됐다. 폭포 일대 해안가는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 수시로 총살형이 집행되던 처형장이었다.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펴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1998)를 보면, 김씨 가족이 살았던 동광리 주민 가운데 정방폭포 근처에서 총살된 사람이 45명에 이른다.

밤새 눈길 헤치며 산속으로 피했으나 토벌대에 발각돼

김씨의 부모는 전남 영암 출신이었다. 김씨가 3살 때인 1940년 제주도로 들어왔다. 같은 해 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주에서 공사판 십장으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4·3 당시 김씨 가족은 중산간 오지인 안덕면 동광리 조수궤에 살았다. 4·3 당시 토벌대가 불을 질러 없어진 무등이왓과는 멀지 않은 마을로, 1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4남매를 뒀던 김씨 가족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다. 부모님은 4살 위 언니(김복례)를 일찌감치 제주시 한림으로 입양 보냈다. 언니 위에 오빠(김복용·당시 17)가 있었지만 4·3 때 붙들려 광주형무소에 갇혔다가 병으로 죽었다.

2015년 4월11일 서순실 심방이 집전한 서귀포시 서복전시관 안에서 열린 정방폭포 해원상생굿의 모습이다. 제단에는 희생자 2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제주4·3연구소 제공
2015년 4월11일 서순실 심방이 집전한 서귀포시 서복전시관 안에서 열린 정방폭포 해원상생굿의 모습이다. 제단에는 희생자 2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제주4·3연구소 제공
1948년 11월 중순께 토벌대의 소개령에 이어 마을이 불타자 제주도에 연고가 없던 김씨 가족은 마을 주민들을 따라 자연동굴인 동광리 ‘큰넓궤’로 몸을 피했다. 오빠는 이미 친구들이 있는 무등이왓으로 간 뒤여서 네 식구만 함께 갔다. 김씨는 “굴에 있다가 밤이 되면 어머니와 같이 기어 나와 불탄 집으로 가 불을 피워 밥을 해먹거나 보리밥을 지어 질구덕에 담아와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동안 동굴에서 생활하던 김씨 가족은 짐을 꾸려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굴이 발각돼 곧 토벌대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한밤중에 굴을 나온 주민들은 어른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인 산길을 헤치며 해발 1300m가 넘는 한라산 영실 부근 볼레오름 지역으로 향했다.

“토벌대가 온다니까 주민들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어.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고 그랬지. 지팡이를 짚은 아버지를 어머니가 부축하고, 우리는 눈더미에 푹푹 빠지면서 그 뒤를 쫓아갔어.”

주민들은 밤새 눈길을 걸어 한라산 깊숙이 들어갔지만, 반나절을 못 넘기고 뒤쫓아온 토벌대에 붙잡혔다. “춥고 피곤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팡팡’ 총소리가 났어. 해가 환하게 뜬 아침이었지. 중문까지 끌려왔는데, 앞뒤에 선 총 든 군인들이 힘이 들어 처지는 사람이 있으면 마구 때렸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나이 든 부부가 출산한 아기를 버려두고 오는 장면도 목격했다. “새벽녘에 이불 속에서 보니 한 아주머니가 거적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 있다가 갈옷에 벌겋게 피가 묻은 채 들어오더라고. 사람들이 ‘애기 낳고 왔구나’라고 수군거리는 걸 들었지. 그 부부에게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

김복순씨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팔순을 맞아 ‘자랑스러운 어머니상’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한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김복순씨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팔순을 맞아 ‘자랑스러운 어머니상’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한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똑똑히 봤다. 정방폭포에 널린 시신들을”

중문으로 끌려간 주민들은 다시 서귀면사무소 인근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용소는 정방폭포 들머리에 있었다. 1996년 제주도의회의 <제주4·3피해보고서>에 나온 김씨 남동생(작고)의 증언은 구체적이다.

“중문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어른들을 불러가 머리가 터져 피로 얼룩질 정도로 초주검을 만들었다. (서귀포에) 가서도 어른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마구 때렸다. 거기서 3일째 되던 때 그들이 하는 말이 아이들을 살릴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아버지가 손을 들었고, 이를 본 사람들이 절반 이상 손을 들었다. 죽어도 다 같이 죽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이날 아침 마지막 주먹밥을 든 아이들과 어른 86명을 정방폭포 옆에 세우고…나는 똑똑히 봤다. 시체는 정방폭포에 많이 깔려 있었다.” (김복남의 증언)

김씨도 부모의 죽음을 먼발치서 목격했다. “수용소로 쓰는 창고 밖으로 나오니 따뜻하고 좋은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어. 한 아주머니가 ‘야, 저기 해 뜨는 쪽을 봐. 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죽이고 있어. 모두 세워놓고 총 쏘고 있어’ 하는 거야. 그때는 나무들이 크지 않고 집들도 없어서 다 보였어. ‘팡팡’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쓰러지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죽고 있다는 생각에 울기만 했어.”

김씨는 부모 시신을 찾을 생각도 못 했다. 동생과 살아갈 앞날이 더 큰 문제였다. 수용소에서 한달여 정도 생활하다 남동생은 강정마을로, 김씨는 서귀포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다 한림으로 입양됐다. 김씨는 서귀포에 살 때 천지연에 빨래하러 다녀오다가 돌을 나르는 오빠를 만났지만, 주변 사람들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지나쳤던 것이 지금도 한으로 남아 있다. 남의집살이를 하며 ‘폭도 새끼’라는 말을 듣던 상황이라 오빠를 보고도 말 한마디 건넬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뒤 오빠가 광주형무소에서 형기를 다 마칠 무렵 이질에 걸려 숨졌다는 말을 오빠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파트 창가로 내려다보는 김복순씨.
아파트 창가로 내려다보는 김복순씨.

이산가족 찾기로 극적 상봉한 남매

1952년 육지로 떠난 언니를 찾으러 무작정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15살 때였다. 그 뒤 전국을 헤매며 생활하다 25살 무렵 고향에 내려와 동생을 만났다. 삼남매는 1980년대 초 방송국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30년만에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지금은 모두 고인이 돼 홀로 남았다.

김씨는 지난 2015년 4월11일 제주민예총이 당시 총살현장인 서복전시관에서 연 4·3해원상생굿에 갔다가 설움을 참지 못 하고 대성통곡했다. “이곳이 어머니 아버지가 죽은 곳이로구나. 저곳이 부모님이 우리한테 주먹밥을 주던 곳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고 했다.

“지금도 밤에는 부모님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베개가 다 젖을 때도 있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당시 기억이 점점 흐려져 가.” 김씨가 아파트 창 너머로 70년 전 가족과 함께 토벌대에 이끌려 내려왔던 곳을 가리켰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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