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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총살된 가족들…왜 쐈는지, 누구도 모른다

등록 2018-12-04 11:33수정 2018-12-04 17:11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 ⑧ 총살·도피·귀순…고기정씨 가족 4·3 수난사
고기정씨가 4·3 때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기정씨가 4·3 때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볼레낭(보리수나무) 가지를 쥐고 힘껏 당기자 빨갛게 익은 볼레 한 움큼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소년은 볼레를 입속에 털어 넣으며 또다시 수풀 속으로 뛰었다. 1949년 1~2월, 많은 눈이 내린 한라산에는 볼레낭마다 빨간 볼레가 무성하게 열렸다. 눈 덮인 한겨울 한라산에서 배고픈 주민들에게는 볼레가 ‘생명의 양식’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많은 볼레가 열린 계절을 다시는 겪지 못했다.

내 눈앞에서 총살된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1948년 11월7일 오전, 판초를 뒤집어쓴 군인 3명이 중산간 마을인 남제주군 남원면(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의 11살 소년 고기정(81)씨 집으로 들이닥쳤다. 바람이 불어 추운 날이었다. 새까만 연기가 하늬바람을 타고 고씨 집으로 밀려왔다. 안거리(안채)에 있던 고씨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는 밖거리(바깥채)에 모여 떨고 있었다. 할아버지(고광호·77)와 할머니(김광일·78), 아버지(고영평·47)와 어머니(김연하·43), 둘째 누나(18)와 여동생 둘이 있었다. “죄이신 사람이나 곱으레 댕기지, 무사 곱으레 댕기느냐?”(죄 있는 사람이나 숨으러 다니지, 왜 숨으러 다니느냐). 할아버지는 한사코 피신을 거부했다. 아버지는 다시 설득했다. “경해도 고쳐 사삽주. 저거 봅서. 우로 연기 나고 총소리 남신디 어떵 허쿠과?”(그래도 비켜서야지요. 저기 보세요. 위로 연기가 나고 총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제주4·3 때 큰 피해를 입은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는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제주4·3 때 큰 피해를 입은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는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지엠시’(군용 트럭)를 타고 온 9연대 군인들이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불을 놓기 시작했다. 초가지붕의 ‘그슨 새’(그을린 띠)와 ‘묵은 새’(오래된 띠) 타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했다. 이날은 ‘군·경합동작전’이 벌어져 오전에는 수망리와 의귀리를, 오후에는 한남리를 불태운 날이다.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일주도로 주변은 경찰이, 의귀리 등 중산간 마을은 군이 맡아 불을 질렀다.

집 마당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빨갱이 새끼들 나오라”고 소리쳤다. 아버지가 나가자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버지 다음은 할머니, 할아버지 차례였다. 한꺼번에 세 명이 마당에 쓰러졌다. 총을 쏜 군인들은 고씨 가족이 살던 초가 3채에 불을 붙였다. 불은 바람을 타고 탈곡을 하러 쌓아둔 집 마당의 산듸(밭벼)에 옮겨붙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몸에도 불이 붙었다. 고씨와 가족들은 부엌에서 이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이날 의귀리에서는 300여 가구 가운데 20여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불에 탔다.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 집 마당서 총살돼
눈길 헤치고 한라산 성판악 부근서 피신생활
보리수 열매로 연명하던 그 겨울…빨간 똥만 나왔다

군인들이 돌아가고 총소리가 수그러들자 숙부와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날 저녁 세 사람의 주검을 수습해 이웃 밭에 임시로 묻고 바로 옆 고모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10여일을 지내고, 의귀·수망·한남리 주민들과 함께 한라산 쪽으로 10여㎞ 떨어진 마흐니오름 서쪽 ‘조진내’라는 곳으로 피신했다. 한라산 쪽 밀림지대는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고씨는 “마을 어른들이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며, 그 기간만 피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도 농작물을 걷으러 다니다 총소리가 나면 숨고 하는 생활을 하다가 피신했다. 연자방아에 좁쌀을 갈아 일주일 치 양식을 만들어 밭갈쇠(일소)에 싣고 갔다”고 했다. 다음달 결혼 날짜를 받아 놓은 둘째누나도 피신길에 따라나섰다.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 뒷면에는 의귀리에서만 248명의 희생자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 뒷면에는 의귀리에서만 248명의 희생자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
피신처가 발각돼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신처에는 60~70여 가구가 모여들었다. 저마다 얕은 돌담을 쌓고 어욱(억새)을 덮어 하루하루를 견뎠다. 일주일이면 끝날 것 같았던 피신생활은 기약 없이 길어졌다. 12월20일께 피신처가 토벌대에 발각됐다. 작은 마을 규모로 커진 피신처 주민들이 식량이 부족하면 고구마를 캐거나 먹을 것을 챙기러 마을을 오가다 보니 눈 위에 고스란히 흔적이 남게 된 것이다. 토벌대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주민들이 흩어졌다.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와 아기를 낳은 산모들은 총부리를 피할 수 없었다. 피신처에서 숨진 주민만 20명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토벌대는 솥단지와 그릇들을 깨뜨리고, 양식과 돌담 위로 얼기설기 엮은 어욱에 불을 질렀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근처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다 군·경 토벌대에 붙잡혔다. 조진내가 불탄 뒤 고씨 가족은 외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고씨는 “표선지서에 끌려간 어머니가 소변을 보겠다며 나왔다가 지서 성담(울타리)을 넘었다. 이어 바깥쪽에 쌓은 성담까지 넘어 눈길에 난 발자국을 따라 외할머니가 있는 곳까지 한밤중에 왔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서로 끌려간 주민 30여명은 대부분 표선 백사장에서 총살됐다.

고씨네와 숙부네 가족은 피신처 인근의 궤(동굴)와 수풀 속에 숨어지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토벌을 피해 이동하는 나날이 반복됐다. 수망리나 의귀리까지 내려가 구해온 썩은 고구마를 삶아 먹다가, 그것마저 떨어지면 굶었다.

고기정씨가 4·3 때 집 마당에서 4·3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기정씨가 4·3 때 집 마당에서 4·3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판악까지 피신했던 식구들 토벌대에 붙잡혀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이들에게 볼레(보리수 열매)는 최고의 양식이었다. 고씨는 “씨까지 모두 먹어 똥을 싸면 벌겋게 나왔다. 볼레가 아니었으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볼레가 큰 양식이 됐다”고 말했다.

토벌대의 총소리가 나면 해발 600~800m에 있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병참도로인 ‘하치마키도로’를 넘어 한라산 성판악 쪽으로 피신했다가 내려오곤 했다. 고씨는 “총소리가 나거나 인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반대쪽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겨울 막내 여동생을 업고 숨을 곳을 찾아다녔다. 추위가 심할 땐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피우기도 했다.

고씨 가족은 성판악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궤펜이오름(해발 792m) 부근까지 피신했다. 토벌대는 산 속에 숨을 만한 곳을 없애려고 마구잡이로 불을 놓았다. 추위가 풀려 눈이 녹을 무렵, 산 위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조천면 교래리에 주둔했던 2연대의 2개 중대 병력이 성판악부터 아래쪽으로 ‘토끼몰이’하듯 토벌작전을 벌인 것이다. 불에 탄 산 속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숙부와 사촌 누나(당시 13), 어머니와 둘째 누나, 누이동생이 토벌대에 붙잡혔다. 이들은 교래리로 갔다가 제주시 주정공장에 수용됐다. 고씨와 사촌 형(당시 17)은 군인들이 닥치자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간 뒤 산에서 만난 주민들과 피신생활을 이어갔다. 신발은 얼기설기 엮은 짚신이 고작이었다. 동상에 걸린 주민들 발에서 고름이 흘렀다.

고기정씨가 상념에 잠겨 있다.
고기정씨가 상념에 잠겨 있다.
“11살에 산에 올라 12살에 내려왔다…그 시절 누가 이해할까”

1949년 봄이 되자 귀순을 권고하는 삐라가 비행기에서 살포됐다. 볼레도 없는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귀순자는 백기를 들라’는 삐라의 지시대로 고씨와 사촌 형은 하얀 헝겊 조각을 막대기에 걸어 산 아래로 내려왔다. 숲 속에 숨어 살다가 토벌대가 불 태워 시야가 탁 트인 들을 보니 별천지 같았다.

“산에서 내려오다 궤(동굴)에서 하룻밤 자고 의귀초등학교를 거쳐 남원지서로 귀순했어. 군인들이 1개월 반 정도 주둔한 학교 운동장은 하얀 소뼈로 가득했지. 소는 주민들이 밭 갈 때 없으면 안 될 재산이었는데 군인들이 다 잡아먹어 버린 거야. 죽지 않으려고 11살 때 올라간 산을 12살 때 내려왔어.” 고씨의 말이다.

귀순한 고씨는 수용소로 쓰던 서귀포 단추공장에서 14일을 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이가 많은 사촌 형은 한 달을 더 살았다. 단추공장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어. 수백 명이 수용된 것 같은데, 내가 있을 때만 해도 매일 사람이 죽는 거 같았어. 취조가 심하니까 취조받으러 갔다 오면 숨만 살아서 온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같이 취조받은 사람들이 부축해서 앉히는 경우도 있었어.”

군·경은 의귀리를 둘러가며 성(돌담)을 쌓게 하고 그 안에 의귀·수망·한남리 주민들을 살게 했다. 주정공장에 수용됐던 어머니와 둘째 누나, 여동생들은 2개월 남짓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성안에서 살던 어머니는 이듬해인 1950년 8월 세상을 떠났고, 막내 여동생은 그로부터 1년을 못 넘기고 영양실조로 숨졌다. 함께 갔던 숙부는 대전형무소로 간 뒤 행방불명됐다. 단추공장에서 돌아온 고씨는 성안에 살면서 수망리와 한남리와 인근 신흥리의 성 쌓는 일에 동원됐다.

“기가 막혀. 내 눈앞에서 말 한마디 못한 채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꺼번에 돌아가셨어. 산 속에 피신해 있을 때 토벌대가 습격 와서 사람들이 죽어 나간 일이 떠오를 때면 잠도 오지 않아. 우린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거야.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말하면 믿지 못하겠지. 천지간에 그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느냐고 말이야.”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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