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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군 총에 다섯 식구 잃은 정씨집 종손…그가 평생 민주당만 찍은 이유는

등록 2018-12-10 11:47수정 2018-12-10 14:34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 ⑨
표선 가시리 정홍기씨, 집마당에서 가족 학살 목격
총상 입은 할아버지는 후유증으로 이듬해 숨져
무장대에 끌려간 아버지는 육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
11대 종손이지만 ‘못 배운 게 한’…평생 농사일해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출신 정홍기씨가 4·3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출신 정홍기씨가 4·3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1948년 11월15일 아침 7시 무렵. 해가 채 뜨기 전이었다. 남제주군(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안좌동 정홍기(76, 제주시 도남동)씨는 집에서 10여m 떨어진 할아버지(정성돈) 집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정씨의 옷을 입혀줄 때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제기 입으라. 어멍안티 강 제기 먹게.”(빨리 옷을 입어라. 어머니 집에 가서 빨리 밥을 먹자) 할아버지가 손자를 재촉했다.

조금 뒤 철모를 쓴 군인 7명이 집 마당에 들어섰다. 어머니(김연우, 당시 23)가 막내 남동생을 출산한 지 닷새밖에 되지 않은 날이었다. 할머니(오기경)는 부엌에서 며느리를 위해 메밀가루로 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총구를 들이댄 군인들은 횃불을 초가지붕에 붙이면서 나오라고 윽박질렀다. 군인들의 발길질에 어머니가 쓰던 구덕(대바구니)이 마당에 나뒹굴었다.

할머니, 어머니와 갓 낳은 동생, 고모와 고종사촌 한꺼번에 희생

할아버지와 할머니, 생후 5일 된 갓난아기를 안은 어머니, 친정에 와 있던 둘째 고모와 고종사촌(고모 딸), 그리고 6살이던 정씨와 정씨의 3살 동생(정홍택·73) 등 8명은 집 마당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갑자기 군인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정씨와 동생을 제외한 식구 5명이 몰살했다. 어머니는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안고 있던 갓난아기를 놓쳤다. 정씨는 막냇동생의 귀에서 검은 피가 ‘팍팍’ 터져 나오는 것을 봤다. 정씨는 “어른들만 쏘고, 나와 내 동생은 어려서 쏘지 않은 것 같다. 그때 일이 너무 선명하다”고 했다. 초가지붕 띠(새)가 탄 짙은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안좌동 올레길에 퍼졌다. 가시리 본동에서 2㎞ 남짓 떨어진 안좌동은 외딴 중산간 마을이다.

제주4·3 이후 마을이 복구되면서 처음 만든 민보단 사무실과 당시 리장, 파견소 직원 및 지역 유지들. 민보단 사무실은 지금의 가시리사무소 자리에 있었다. <가스름지>
제주4·3 이후 마을이 복구되면서 처음 만든 민보단 사무실과 당시 리장, 파견소 직원 및 지역 유지들. 민보단 사무실은 지금의 가시리사무소 자리에 있었다. <가스름지>
가시리가 펴낸 마을지 <가스름지>(1988)는 이날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이 가시리에서 벌어졌다. 이날 아침 새벽부터 총소리가 소란하였고, 이곳저곳에서 불기둥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피난 못 한 일부 주민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거나 불에 타 죽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으며, 오후가 되어 총성은 멎었으나,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고 처절한 울음소리가 온 마을을 메웠다. 처참한 지옥도를 연상케 하였다.”

목축을 주로 하는 가시리는 제주4·3 당시 인명 피해가 많았던 마을 가운데 하나다. <가스름지>에는 “사망 374명, 실종 12명, 가옥 363호가 방화로 소실됐고, 1200여명의 이재민을 냈다. 가축 피해는 소 1천여마리, 말 600여마리, 돼지 370여마리, 닭 2천여마리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 이날 하루에만 30명 넘게 희생됐다. 군인들은 같은 해 12월22일 표선초등학교에 수용됐던 가시리 주민 160여명 가운데 76명을 표선리 ‘버들못’ 부근에서 학살했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간주해 총을 쏜 것이다.

할아버지는 팔에 총을 맞고도 손자 둘 안고 피신

군인들이 철수한 뒤 피가 흥건한 마당에서 할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할아버지는 왼팔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손자 둘을 안고 가까운 대나무밭으로 피했다. 밭 너머 돌담 옆에 있던 군인들이 보이지 않자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할머니, 어머니와 막냇동생, 고모와 고모 딸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를 많이 흘려서 추웠던 모양이에요. 불에 타고 있던 멍석을 비벼 끈 뒤 덮어서 잠깐 잠이 들었어요.” 정씨는 “잠시 피신한 이웃들은 살았는데, 우리는 갓난아기가 있어 피하지 못하고 모여 있다가 몰살됐다. 아버지(정영익, 당시 22)는 다행히 총소리를 듣고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가시리의 4·3 흔적을 둘러보는 ‘가시마을 4·3길’이 개통됐다.
지난해 10월 가시리의 4·3 흔적을 둘러보는 ‘가시마을 4·3길’이 개통됐다.
이날의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햇볕은 종일 따사로웠다. 햇살이 비추자 할아버지는 손자들과 함께 불타버린 집터 뒤 동백나무 아래 기대앉았다. 할아버지는 계란을 깨 피가 흐르는 왼팔에 바른 뒤 호미로 잘라낸 버드나무 가지로 동여맸다. 해 질 무렵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집 마당에 들어서자 큰 소리로 통곡했지만 시신을 처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피신했던 친척들도 날이 어두워지자 돌아왔다.

“마을에 둘째 할아버지 댁이 있었는데 그곳은 불에 타지 않아 모두 그곳에 모였어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숨어지냈던 터라 배가 고팠습니다. 마침 할아버지가 기르던 돼지가 불에 타 죽었는데, 그 돼지를 옮겨 와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 마당에서 희생된 가족들의 시신에는 그 자리에 임시로 흙만 덮었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한밤중에 마을에서 6㎞ 남짓 떨어진 남원면 신흥2리 외가로 향했다.

이날은 음력으로 10월 보름이었다. 보름달이 훤하게 대지를 비췄다. “작은고모부가 나를 업고, 아버지는 3살 난 동생을 업고 산길을 걸어서 신흥2리 작은고모 댁을 찾아갔어요. 총을 맞아 팔을 심하게 다친 할아버지도 함께 갔어요.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걸었어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날, 가지 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죽은 식구들을 토롱(가매장)하기 위해 신흥리와 안좌동을 오갔다. 아버지가 두번째로 안좌동으로 가던 날, 정씨는 아버지를 막무가내로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울면서 쫓아갔는데, 그것이 아버지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거예요.”

정홍기씨가 4·3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홍기씨가 4·3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안좌동으로 간 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와 마주쳤다. 무장대에 끌려간 아버지는 나중에 귀순하거나 토벌대에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아버지 소식을 한참 뒤에 들었다. 당시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등을 보면, 정씨의 아버지는 1949년 7월2일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로 갔고, 1950년 1월20일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뒤 소식이 끊겼다. 행방불명된 아버지 이름은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 행방불명인 표지석에 있다. 외가에 함께 갔던 할아버지는 총상 후유증으로 이듬해 6월25일(음력 5월29일) 숨졌다.

정씨는 신흥2리에서도 4·3의 영향으로 여러 차례 옮기며 살았다. 그렇게 3년을 산 정씨는 9살 때 가시리로 돌아왔다. 집안의 11대 종손이던 정씨는 “친척들이 회의해서 ‘형제를 외가에만 맡기면 되느냐. 종손만이라도 가시리로 데려와야 한다’고 해서 둘째 할아버지 댁으로 왔고, 동생은 외가에 머물렀다”고 했다.

가시리로 돌아온 정씨는 가시리 본동 ‘성안’에 살았다. 군경은 무장대의 습격을 막기 위해 표선면 주민들을 동원해 마을을 둘러가며 돌담을 쌓게 했다. 주민들은 그 속에 자그마한 돌담을 두르고 억새를 덮은 움막에서 집단생활을 해야 했다. 주민들은 1955년 3월이 돼서야 이전에 살던 집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향에 왔지만, 학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러웠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 서러웠다.

못 배운 게 서러워…4·3 때만 되면 설레

“열다섯살 무렵부터 겨울철이 되면 산에 가서 땔감 해 오고, 소먹이 주러 다니는 일을 했어요. 그때부터 산에 가서 숯을 구웠으니까요. 친구들이 중학교 다닐 때, 나는 숯을 구워 오면 억새로 끈을 만들어 숯을 담고 등짐 져 표선리까지 팔러 다니고, 여름이 되면 밭에만 다녔어요.” 표선리는 마을에서 10㎞ 남짓 떨어져 있다.

정홍기씨와 아내 김영자씨.
정홍기씨와 아내 김영자씨.
옆에 있던 아내 김영자(77)씨가 끼어들었다. “쇠 장남질 안행 내부러시민 아방은 외가칩이라도 강 살걸, 학교 무뚱에도 못가오난 눈 어두겅 살아지쿠과. 학교 무뚱에라도 가시민 눈이라도 호썰 틀거 아니우꽈. 그게 가장 서러운거라마씸. 게난 어떵사 살아신지 몰르쿠다.”(쇠처럼 장남 일을 안 하게 그냥 뒀으면 남편은 외가에라도 가서 살 텐데, 학교 마당에도 다니지 못하니 눈이 어두워 살아지나요. 학교 마당에라도 갔으면 눈이라도 조금 뜰 게 아닌가요. 그게 가장 서러운 일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정씨는 20살 때 김씨(당시 21살)를 만나 안좌동 옛집을 복구해 살았다. 김씨의 말이 이어졌다. “종손이난 무사 허여 먹을 일은 조금광. 정월 한 달은 맹질 붙영 세 번, 팔월에도 맹질 붙영 세 번, 또 달달이 해먹고, 경 해나수다.”(종손이니 왜 먹을 일은 많은지. 정월 한달은 명절 포함해 세번, 팔월에도 명절 포함해 세번, 그리고 다달이 제사 지내고, 그렇게 했었어요)

정씨는 평생 ‘민주당’ 지지자로 살았다. 정치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민주당이 ‘4·3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4·3위원회 폐지’ 등이 거론될 때는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분노했다.

“정부가 4·3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그때 죽은 어른들 한을 다 풀 수는 없겠지만, 100분의 1이라도 보상해줘야 합니다. 멀쩡한 사람들을 죽였으니 보상해야지요.”

아내 김씨가 “4월3일이 되면 평화공원에 가려고 마음이 설렌다. 시아버님 얼굴도 모르지만, 갔다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자, 정씨도 “나도 그래. 지금도 부모님이 자주 생각난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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