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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끌려간 스물일곱 동갑내기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등록 2018-12-27 05:00수정 2018-12-27 11:11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11)
97살 이임규 할머니의 ‘짧은 만남 영원한 이별’
“1년 반 살고 끌려갔지만, 지금도 남편 생각나”
농사 짓던 남편은 마포형무소에서 행방불명
뱃속 아기는 남편이 형무소로 가던 그달 출생
아들 때문에 끌려간 시어머니도 4·3 때 희생
제주4·3 때 남편을 잃은 이임규(97) 할머니가 지난 23일 처음으로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된 남편의 표석을 찾어 어루만지고 있다.
제주4·3 때 남편을 잃은 이임규(97) 할머니가 지난 23일 처음으로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된 남편의 표석을 찾어 어루만지고 있다.
“아이고, 벗덜 하난 조쿠다.”(친구들이 많으니 좋겠어요)

할머니가 털썩 주저앉으며 남편의 표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100살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주름은 깊었고, 눈가에선 언뜻 눈물이 비쳤다. 지난 23일 이임규(97·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할머니는 딸과 손자의 부축을 받으며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행방불명된 이들의 표석이 생긴 뒤, 할머니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홀로 외롭지 않았을까, 늘 그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남편의 표석을 어루만지던 할머니는 연신 “벗시난 조쿠다”(벗이 있으니까 좋겠어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할머니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수많은 잿빛 표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할머니가 딸 정영순(70)씨게 말했다. “죽은 사람이 이추룩도 하느냐. 비석이 잘도 하다. 시상에.”(죽은 사람이 이렇게도 많니? 비석이 아주 많다. 세상에.) “게메마씸. 죄어신 사람들 많이 죽으난. 경해도 산 때 오난 다행이우다.”(그러게요.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으니까. 그래도 살 때 오니까 다행이에요.) 딸이 말을 받았다. 할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딸에게 ‘너의 아버지는 키도 크고 얼굴도 좋았다’고 말했다. 스물일곱 태중에 남편을 떠나보낸 여인과 그렇게 유복자로 태어난 딸의 대화에서는 물기가 묻어났다.

이임규 할머니가 지난 23일 제주시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에서 딸과 함께 남편의 비석에 잔을 올리고 있다.
이임규 할머니가 지난 23일 제주시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에서 딸과 함께 남편의 비석에 잔을 올리고 있다.
처음 찾은 남편의 비석…‘벗들 있어 좋겠어요’

비석에 적힌 이름은 ‘정원종’. 할머니의 동갑내기 남편이다.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1년 반을 함께 살았고, 27살 때 ‘곧 돌아오겠다’며 집을 나선 남편은 아내가 100살 가까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짧은 만남, 영원한 이별이었다.

세월이 흘러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밤에 제우 좀들젠 허난 누게가 올레로 오랑 ’원종이 이시냐’허멍 불릅디다. 좀들만은 해신디 화룩허게 일어낭 무뚱더래 나가난 ‘어디로 감이꽈. 나가지 맙서’허난, ‘나갔당 오켄’헙디다게. 경허난 들어오카부덴 해신디 그걸로 끝이라마씸.”(밤에 누워 겨우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 올레에 와서 ‘원종이 있나’하며 불렀어요. 잠들려던 참에 남편이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자, (내가) ‘어디 가세요? 나가지 마세요’했는데도 ‘다녀 오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걸로 끝이에요.)

추운 날이었다. 1948년 음력 동짓달(12월)의 어느 밤 10시께다. 남편을 따라 올레로 나섰지만,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27살 젊은 남편은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아내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남편은 다시는 집으로 오지 못했다.

“오카부덴만 했주, 경 심어가카부덴 해수과?”(올 거라고만 생각했지, 그렇게 잡아 갔을 거라고 생각했겠어요?) 이틀이 지난 뒤에야 할머니는 누군가 남편을 잡아갔다고 생각했다.

신례리에서는 당시 밭농사를 주로 지었다. 그때 제주도에서의 삶이 그러했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벅찼다. 남편과 할머니도 주로 보리나 조 농사를 지었다.

이임규 할머니가 손자 양시영 제주4·3유족회 사무국장과 딸 정영순씨와 이야기 하고 있다.
이임규 할머니가 손자 양시영 제주4·3유족회 사무국장과 딸 정영순씨와 이야기 하고 있다.
농사 짓던 남편, 한밤중 끌려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

애간장을 녹이는 시간이었다. 남편이 끌려가고 며칠 뒤, 할머니는 신례리에서 가까운 해안마을인 공천포에서 남편을 봤다는 말을 한 주민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남편은 머리를 다쳤는지 수건을 머리에 싸매고, 옷은 밤중에 집에서 급히 나갈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고 했다. 토벌대들은 남편과 다른 주민들을 공천포에 임시로 수용했다가 서귀포초등학교 옆 감자창고 수용소로 끌고 갔다. 당시 서귀포에는 감자창고와 단추공장, 전분공장 등이 수용소로 사용됐고, 가혹한 고문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남편은 그곳에서 누군가를 통해 ‘아내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지만, 할머니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것 같아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했다. “보고 싶으면 어떵 말이우꽈. 원망 들으카부덴 안가수다.”(보고 싶으면 어떡해요. 원망을 들을까 봐 가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그러다 감자창고 수용소로 갔다. 먼발치서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27살 동갑내기 부부는 닥쳐올 운명을 알았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서로 바라만보다가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 남편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그 뒤로 더는 남편을 볼 수가 없었다.

남편은 다시 제주읍으로 옮겨졌다. 당시 제주읍으로 옮겨진 청년들은 주로 제주주정공장에 수용됐다가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다른 지방 형무소로 이송됐다.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받은 ’수형인명부’를 보면, 할머니의 남편은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기록에는 또 남편이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마을의 구장(지금의 이장)을 했던 시아버지는 서울까지 가서 남편을 면회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두 번째 면회를 갔을 때 남편은 행방불명됐다.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할머니는 남편의 생일에 맞춰 가족들과 함께 제사를 지낸다.

이임규 할머니의 남편 고 정원종.
이임규 할머니의 남편 고 정원종.
할머니와 함께 끌려간 시어머니도 희생돼

남편이 끌려 간 이듬해인 1949년 1월27일에는 할머니가 그의 시어머니(김려윤·당시 48)와 함께 집 마당에서 감자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3~4명의 청년이 손에 죽창을 들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학련(전국통일학생총연맹) 소속 학생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할머니와 그의 5살 난 큰딸, 시어머니를 공천포로 바닷가의 조그마한 집으로 끌고 갔다.

청년들은 방 하나에는 할머니와 큰딸을, 다른 방에는 시어머니를 감금했다. 2월5일, 그들은 시어머니한테 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난 길을 걷도록 했다. 할머니는 “왜 어머니를 잡아가느냐”고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한 듯 며느리에게 “느라도 살아사주. 저 애기 키우고 강 잘 살라이”(너라도 살아야지. 저 아기 키우고 가서 잘 살아)라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당시 할머니는 통곡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얼마 뒤 청년들은 길가에서 시어머니를 살해하고 주검을 가마니를 덮었다. 가족들이 나서서 시신을 수습했다. 할머니는 “시어머니가 아주 좋은 분이었는데 불쌍하게 돌아가셨다”고 회고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국회 차원의 양민학살 사건 조사를 앞두고 접수한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할머니의 시동생(정팽종)은 자신의 어머니와 형을 학살한 집행자에 대한 엄중 처단과 무죄규명, 보상금 청구 등을 요구했다.

이임규 할머니가 제주4·3에 얽힌 가족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임규 할머니가 제주4·3에 얽힌 가족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내가 임신한지 모른 채 끌려간 남편

할머니의 남편은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끌려갔다. 할머니는 낙태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방도 엇고 어떵행 살랜게. 송화꼬룰 행 혼 솥 딸령 물 반사발만 되게 행 먹으민 당장 진덴 헙디다. 게난 몬딱 나가부난 개 돼지도 몰르게 놈의 소낭밭디 강 그거 거덩 오랑 화룩허게 해 먹엉 초집 위에서 알러레 털어져신디도 안 집디다.”(딸이 아버지도 없이 어떻게 살라고요. 송홧가루를 한 솥 달여 물 반 사발만 묽게 해서 먹으면 당장 유산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같이 살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아무도 모르게 남의 소나무밭에 가서 송홧가루를 채취해 와서 급하게 해 먹고 초가 지붕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유산이 안 됐어요.)

옆에 있던 딸 정씨가 어머니의 말에 웃음을 보였다. 어머니가 지우지 못한 딸은 아버지가 마포형무소로 이송된 그달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4·3 때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을 뿐, 4·3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건 2008년 제주4·3평화공원이 만들어지면서다. 정씨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남의 집 방 한 칸 빌려 살면서 어머니와 진짜 고생을 많이했다”고 회고했다. 초등학생 때는 어머니와 함께 산에서 땔감용 나무를 벌채해 온 뒤, 다음날 새벽 이를 조각내 서귀포 솔동산까지 짊어지고 팔러 다녔다. “나도 고생 하영허고, 어머니도 고생 하영 허멍 사난, 이제랑은 옷도 곱게 입고 허랜 해도 어렵게 살아노난 버리지도 못허고 천성이 되분거라마씸. 매날 싸왐수다.” (나도 고생 많이 하고, 어머니도 고생 많이 하시며 살아서, 이제는 고운 옷 입고 하시라고 해도 어렵게 살아와서 헌 옷을 버리지도 못하시고. 천성이 됐어요. 매일 싸워요.) 딸이 말했다.

이임규 할머니가 지난 23일 증손자, 며느리, 딸과 함께 제주4·3평화공원을 둘러보고 있다.
이임규 할머니가 지난 23일 증손자, 며느리, 딸과 함께 제주4·3평화공원을 둘러보고 있다.
유복자로 난 딸, 아직도 아버지의 호적에 없어

정씨는 호적상 백부(큰 아버지)의 딸로 돼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혼인신고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4·3 때 돌아가셔도 저는 유족이 되지 못했어요. 호적을 발급받을 일도 없고 해서 몰랐죠.” 정씨가 말했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어머니가 양자를 들이기 위해 호적을 만들었지만, 법적 절차가 까다로워 여전히 정씨는 백부의 딸로 남아있다. “게난 어이가 엇고, 지금도 공원에 오멍도 내가 제라한 아버지 딸인데 유족 취급을 못 받고 허난 너무 기가 막힌 일이라 마씸.”(그러니 어이가 없고, 지금도 공원에 오면서도 내가 진짜 아버지 딸인데 유족 취급을 받지 못하니 너무 기가 막힐 일이에요.)

정씨의 아들 양시영(47)씨는 제주4·3유족회 사무국장으로 3년째 활동하면서 집안의 4·3 내력을 확인해가고 있다. 양 국장은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하는데, 아직 못해드려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아버지’라고 한번 불러보고 싶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요. 그게 소원입니다. 그러다가도 혹시 어디엔가 살아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정씨가 말했다. 딸의 이야기를 듣던 할머니가 나즈막히 말했다. “매날 튼내만해집니다. 살아시민 게도 일이라도 빌엉허곡, 고치 댕겨도 보곡 헐건디, 아이고 죽음이 무신거 마씸.”(매일 생각만 납니다. 살았으면 그래도 일이라도 빌어서 하고, 같이 다니기도 할 텐데, 아이고 죽는다는 게 뭡니까.)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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