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전 찾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제주해녀박물관 옆 연두망동산은 소나무와 수풀이 무성했다. 한쪽에는 제주올레 21코스가 지난다는 표식이 있었다. 함께 이곳을 찾은 오수송(87)씨 표정이 착잡해졌다. 동산으로 난 오솔길 옆에 오씨가 서서 손으로 수풀이 우거진 곳을 가리켰다. “이곳이에요. 세화지서 수용소에 수용됐던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날 희생된 곳입니다.”
제주4·3 때 온 가족을 잃은 오수송씨가 1949년 1월 부모와 주민들이 총살당한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연두망동산 앞에 섰다.
하도리 쪽에서 세화리 쪽으로 가려면 연두망동산을 지나야 한다. 세화리와 상도리, 하도리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연두망동산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1월 이 지역 해녀들이 일본인들의 수탈에 맞서 시위를 벌이기 위해 모였던 장소다. 앞에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과 해녀항쟁을 주도한 해녀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 3인의 독립운동가 흉상이 서 있다.
수풀을 가리키는 오씨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오씨는 “어렸을 때는 이곳이 큰 동산이었다. 지금처럼 잡목이나 수풀도 없고, 주변은 모래사장이었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 여성 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 해녀항쟁의 시발점이 된 장소가 제주4·3 시기 학살터가 됐다. ‘그날의 상황’을 오씨는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오수송씨가 4·3 때 온 가족이 희생된 사연을 이야기하며 울먹이고 있다.
“자손 하나만이라도 살려달라”…부모는 떠났다
1949년 2월10일 오전 10시께 구좌면(지금의 제주시 구좌읍) 세화지서 경찰이 지서 맞은편 수용소에 수용된 주민들에게 ‘나오라’고 다그쳤다. 경찰은 주민 40여명을 지서 앞에 세워놓은 뒤 이들을 인근 하도리 연두망동산으로 끌고 갔다. 경찰관 5~6명이 이들을 포위했다.
전날 겨울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길은 질퍽했고, 냉기가 온몸을 감쌌다. 연두망동산은 세화지서에서 1㎞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천릿길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끌려가는 주민들은 이 지역 하도·종달·세화리 주민들이었다. 당시 17살이던 오씨는 아버지(오도원·당시 52) 어머니(고을생·당시 45)와 함께 끌려갔다. 경찰은 연두망동산에 다다르자 끌고 간 주민들을 줄지어 서도록 했다. 곧 처형이 집행될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경찰에게 “조상 앞에 물 한 사발 떠놓을 수 있는 자손 하나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머니도 “제발 아들이라도 살려달라”고 절규했다.
수용소에 수용됐던 오씨는 지서에서 물을 긷고 심부름을 하는 등 사환 생활을 해 경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부모의 간절한 애원과 함께 오씨의 얼굴을 알고 있던 경찰이 오씨를 빼내 지서 쪽으로 가도록 했다. 오씨가 150여m 남짓 걸어가자 곧바로 뒤에서 ‘탕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이 자리에서 40여명이 집단학살됐다. 이날 학살된 주민들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이라도 도피한 이른바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된 이들이었다.
오수송씨의 오른손 중지에는 지서에 수감되기 전 전기고문을 받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할 정도였어요. 내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돌아가셨으니까요. 나이 든 사람뿐 아니라 어린아이들,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죽였어요.” 오씨는 부모를 쏜 경찰들 손에 이끌려 지서에서 다시 사환 생활을 했다.
“제발 살려주세요”빌던 12살 여동생과 9살 남동생
오씨는 집에 남겨진 여동생(오영자·당시 12)과 남동생(오홍림·당시 8)은 친척 할머니가 돌봐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희생된 이틀 뒤 세화리에서 비료 배급소를 운영하는 이모부가 동생들을 데려가려고 하도리 집을 찾았다. 그러나 동생들은 없었다.
부모와 주민들을 총살한 경찰은 그날 오후 하도리에 다시 들이닥쳐 수감되지 않은 ‘도피자 가족’을 다시 잡아갔다. 어린 두 동생도 같은 장소에 끌려갔다. 동생들은 경찰에 매달려 “살려만 달라”고 울며 애원했지만, 총구는 불을 뿜었다. 그 시간 지서에서 사환 일을 하던 오씨는 이모부를 통해 소식을 듣게 됐다. “그때 많은 주민이 처형장면을 목격했어요.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아요. 동생들이 살려달라고 매달리는데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내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부모와 동생들 시신 수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오씨는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수습해 갔지만, 나는 정신이 없는 상태인 데다 혼자 수습할 수도 없었다. 이모부가 부모님과 동생들의 시신에 흙을 덮어 표시만 해뒀다가 5개월 정도 지난 뒤 밭에 묻었다”고 말했다.
오수송씨가 세화지서 수용소에 수용될 때 사람들로 넘쳐나 앉았던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도피한 형님은 행방불명…운항 못 하도록 배에 구멍 뚫어
오씨가 ‘도피자 가족’이 된 것은 3살 위 형 때문이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 직후 참가자들의 거리시위를 구경하던 초등학생부터 젖먹이를 안은 20대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주민 6명이 경찰 발포로 숨졌다. 그 사건 뒤 경찰은 제주도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조천 만세동산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 참가했던 형(오장송·당시 20)도 그때 세화지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형에게 “책임자가 누구냐. 어떤 일을 했느냐”며 온갖 고문을 했다. 오씨는 “경찰이 몽둥이로 형을 죽지 않을 정도로 마구 때렸다. 이가 부러지고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지서에 20여일 정도 수용됐다가 풀려난 형은 집에 있으면 다시 경찰에 붙들려갈 것 같아 들녘과 밭, 집의 헛간 등에서 숨어지냈다. 4·3이 본격화하고 토벌대의 토벌작전이 계속되자 형은 중산간 지역에 있는 다랑쉬오름 근처의 자그마한 굴로 피신하는 등 피신생활을 계속했다.
아버지는 초토화가 시작된 1948년 10월 이전 형을 찾아 다른 지방으로 보내려고 했다. 일제 강점기 때 동력선을 운항하는 면허증을 가졌던 아버지는 30대 때 선원들을 모집해 함경도 청진 앞바다까지 가서 정어리잡이를 하기도 했으나, 해방 뒤 고향에 들어온 뒤에는 풍선을 탔다. “그 배로 육지를 다녔어요. 시국이 악화하기 시작하니까 아버지는 어떻게든 형을 찾아 육지로 내보내려고 했는데, 경찰이 하도포구에 배들을 모아놓고 운항을 하지 못하도록 모두 구멍을 뚫어버렸어요. 도주할까 봐 그런 것입니다.”
지서에서 사환 생활을 하던 오씨는 형과 함께 지내다 귀순한 형의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형이 한겨울 중산간 지역에서 동상에 걸려 옷으로 발을 싸맨 채 숨어지내다 1949년 3월28일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경찰의 허가 없이는 다니지 못하던 때라 형의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형의 표석에는 ‘1949년 3월28일 이후 제주지역에서 행불’이라고 적혀 있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연두망동산에 세워진 ‘해녀항쟁’의 주역 부춘화·김옥련·부덕량 3인의 독립운동가 흉상 뒤편에 소나무숲이 1949년 1월 오수송씨의 부모와 주민들이 처형된 장소다. 당시에는 소나무가 없었다.
지서에서 가한 고문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돼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화지서로 잡혀간 것은 1948년 10월 그믐께다. 처음에는 하도리 공회당으로 갔다. 그날 공회당에 끌려간 주민들은 다시 지서로 끌려갔다. 지서로 끌려간 주민들은 먼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오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끌려간 보름 뒤 지서로 연행됐다. 오씨는 지서에 가자마자 전기고문을 받았다. 형이 어디로 도피했는지 대라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손가락에 나무 막대기를 끼워 짓이기는가 하면 나무를 허벅지와 장딴지 사이에 끼우고 꿇려 앉힌 뒤 위에서 짓밟는 등 갖은 고문을 했다.
“형의 소식을 모르는데 어떻게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을 못 하니 각종 고문으로 사람을 죽여놔요. 나만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고, 지서에 끌려간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그렇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고문을 했어요.” 오른손 중지에는 지금도 전기고문을 받았던 흔적이 있다.
고문 받은 뒤에는 세화지서 맞은편 수용소에 감금됐다. 오씨와 부모는 그때부터 처형되기 전까지 2개월 이상 그곳에 수용됐다. 말이 수용소지 창고로 쓰던 건물로 7~8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씨는 그곳에 수용된 인원이 46명이었다고 기억했다.
“자그마한 방에 밤이건 낮이건 사람들을 마구 집어넣으니까 말이 아니었어요. 콩나물 대가리 모양으로 양손으로 무릎을 잡아 구부린 채 앉아 있어야 했어요. 그 많은 사람을 감금하니까 빽빽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에는 행방불명된 오수송씨의 형의 표석이 있다.
지금도 연두망 앞에선 마음 쓰려
가족들을 죽인 경찰들 밑에서 사환 생활을 하던 오씨는 이모부의 세화리 배급소에서 2년 남짓 살면서 가끔 고향 집에 들렀다. 텅 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공을 걷는 것과 같았다.
부모와 형, 동생 둘의 제사는 음력 1월12일에 지낸다. 죽은 날짜를 모르는 형의 제사도 함께 모신다. “이모가 제물을 차려주면 그걸 집에 갖고 와서 그대로 펼쳐놓았어요. 제사 방법도 몰라서 낭푼이(양푼의 제주어)에 밥을 놓고 수저만 꽂아 잔을 올리고 제를 지내다가 결혼한 다음에 정식으로 제사를 모시게 됐어요.”
천애고아가 된 오씨는 “자라면서 주위로부터 압박과 설움도 많이 받았다. 4·3 이야기만 나오면 마음이 괴로웠다. 연두망동산을 지날 때마다 당시 기억이 떠올라 외면하고 싶다가도 고개를 숙이게 된다. 동산만 쳐다보면 마음이 쓰린다”며 눈물을 보였다.
4·3 희생자들에게도 “5·18에 준하는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씨는 4·3유족회를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해마다 4월3일이 되면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리는 추념식에 참석한다. <끝>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연재 후기>
지난 20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을 찾았다. 행방불명인 표지석에는 지난 17일 이른바 ‘4·3 수형인’ 재심 재판에서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아낸 이들처럼 육지형무소로 갔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거나 제주에서 행방불명된 이들까지 포함해 모두 3896기의 표석이 서 있다. 표석 사이를 다니다 보면 ‘강ㅇㅇ의 자’처럼 새겨진 표석들이 눈에 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채 행방불명된 이들의 표석이다. 표지석에서 나와 위령제단을 거쳐 내려오면 원형으로 서 있는 각명비를 만난다. 각명비에 새겨진 1만5천여명에 이르는 이름이 제주4.3의 엄중함을 짐작하게 한다.
지난해 4월 제70주년 4·3추념식 때 각명비 앞에서 간단한 제를 지낸 모습이다.
지난해 3월 제주4· 3 70주년 기획으로 시작한 ‘동백에 묻다’ 연재를 해가 바뀐 지금 끝낸다. 1부 5회를 신문지상(2018년 3월20~4월3일)에, 2부 15회를 온라인(2018년 9월23~2019년 1월21일)에 모두 20회를 연재했다.
제주도 전역은 물론 서울과 일본에서 ‘4·3’을 안고 살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만났다. 집에서, 찻집에서, 희생터에서, 심지어 타향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울먹였고, 함께 눈시울이 뜨거웠다. 만난 사람 대부분이 “내가 글을 쓴다면 소설 한권은 쓸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절절한 사연을 품고 있다. 그들을 만나면서 4·3이 70년 전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그들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제주4·3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상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 나온 후보들의 공약이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제주4·3특별법 개정안에는 군사재판의 무효화와 희생자 배상 문제가 포함돼 있지만, 개정안 처리는 요원하다. 군·경 전사자 또는 우익단체 희생자들은 예우를 받고 있다. 각명비에는 ‘무장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희생자에서 제외돼 이름이 삭제된 이들도 있다. 화해와 상생을 말한다면 최소한 이들의 이름이라도 새길 수 있을 정도의 포용력을 지녀야 한다.
가수 안치환이 지난해 발표한 4·3 노래 ‘4월 동백’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일을 나는 모르오. 그 죽음 나는 모르오. 그 슬픔 나는 알지 못하오.” 연재 기간 자료제공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과 제주4·3연구소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