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에서 한달 동안 살고 있는 청년들이 지난달 10일 골목에서 이웃 주민을 만나고 있다. 전주시사회혁신센터 제공
지난달 2일부터 전북 전주에서 한달 동안 여행을 한 이서진(27)씨는 대표적 관광지인 한옥마을을 좀처럼 찾지 않았다. 이씨가 머문 완산구 중노송동 게스트하우스에서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관광객이 붐비는 거리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붐비는 관광지보다 제가 머문 동네를 한가롭게 걷는 게 더 좋았어요.” 그는 그저 동네를 거닐다 전통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고 오래된 세탁소에 옷을 맡기거나 문방구 등에서 물건을 사며 동네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고 했다.
같은 숙소에서 ‘전주 한달 살기’ 여행을 한 다른 20대 청년 2명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점심때쯤 느지막이 일어나 거실에 있는 벽난로에 땔나무를 넣어 불을 붙이고 밥을 해 먹은 뒤 동네 구경에 나섰다. 세종시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왔다는 이수진(25)씨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함께 여행한 최아현(24)씨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가끔 글을 쓰는 게 여행의 낙이었다”고 말했다.
■ 지역주민의 삶에 참여하는 여행
이들 세 청년은 관광객을 넘어 동네 주민으로 이 지역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이수진씨는 그림을 그려 이웃에게 선물하고, 주민들의 이야기가 담긴 지도를 만들어 마을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수다 모임에도 참여할 정도였다. 지난달 10일 ‘우리 동네 이야기 쉼터’란 이름으로 20대부터 70대 주민 10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들은 마을 주민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모습이 저절로 가능한 건 아니었다. 전주에서 한달 동안 살아보는 방식의 여행을 원하는 청년이 많다는 것에 주목한 도시재생 스타트업(창업회사) ‘별의별’이 지난해 전주시의 ‘사회혁신 리빙랩 프로젝트’에 ‘한달 살기’ 프로그램을 제안한 결과다. 전주시는 이 프로젝트에 2천만원을 지원했다. 리빙랩 프로젝트는 다양한 사회문제의 해법과 아이디어를 찾고 실험해보는 전주시의 사업이다. 주민이 주도해 마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정 자금을 지원해준다. 별의별은 중노송동에서 한달 동안 살 수 있는 청년을 불러 모았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수다 유발자’나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일상사 오지라퍼’ 성향의 청년들이 이 동네에 머문다면 낙후한 동네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다.
전주 구도심인 완산구 중노송동은 한때 번창했던 지역이다. 2006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뒤 주민들이 떠나고 이른바 낙후한 노후 저층 주거지가 됐다. 지금은 주로 노인들이 살고 있으며 빈집도 많다. 하지만 동네 게스트하우스에 청년들이 찾아오자 동네가 활기를 띠고 있다. 주민 이희손(74)씨는 “젊은 사람들이 오니 반갑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며 “동네에 오는 청년들이 더욱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에서 한달 동안 살고 있는 청년 3명이 지난달 10일 동네 쉼터에서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주시사회혁신센터 제공
■ ‘한달살이’ 하다 눌러앉은 청년들
머무는 관광은 지역 정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소연진(29)씨는 지난해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에서 한달을 살아보는 여행을 했다. 한국에 돌아올 때가 됐지만 여행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전남 목포에서 진행되는 ‘괜찮아 마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끝난 지 다섯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목포에 머물며 생활하고 있다.
‘괜찮아 마을’ 기획은 목포 원도심을 청년 대안 공간으로 만들어 청년문제와 도시문제를 해결하자는 청년들의 뜻에서 시작됐다. 문화 기획사 겸 여행사인 ‘공장공장’ 대표 박명호(32)씨가 2017년 9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전남 목포시 구도심으로 이주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목포에 정착한 뒤 또래와 함께 목포에서 터전을 일굴 방법을 고민한 결과였다. 청년들이 목포 구도심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거나 다양한 시도를 하는 등 인생을 재설계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 이 기획의 핵심이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박씨는 지난해 4월 행정안전부의 ‘시민주도 공간 활성화’ 공모사업에 이 프로젝트를 제안해 예산 6억6천만원을 지원받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쇠락한 목포 중앙동에서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싶은 39살 이하 청년”을 모집했다. 40년 된 빈 여관 건물을 숙소로 삼고, 만들어진 지 20년 넘은 빈 식당을 사무실로 꾸며 청년 30명이 한달 반 동안 목포에 머무는 ‘괜찮아 마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청년들은 ‘괜찮은 집’(숙소)에서 머물며 ‘괜찮은 식탁’(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고 ‘괜찮은 공장’(사무실)에서 무엇이든 시도해보고 실패를 연습하는 시간을 보냈다. 빈집을 고치는 방법을 배우거나 잡지를 만들거나,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했다.
청년 총 60명이 지난해 여름과 겨울 ‘괜찮아 마을’에서 목포 ‘한달반살이’를 했는데 프로젝트가 끝난 지금도 28명이 소연진씨처럼 목포에 남아 있다. 6명은 목포에 있는 영화관, 공공기관 등에 취직했고 12명은 목포에서 채식 식당, 빵집, 도자기 공방, 사진관, 펍, 신발 업사이클링 등 창업을 시도 중이다. 프리랜서 영상제작자로 일하던 청년은 목포에서 활동하기로 했고, 아예 결혼해 목포에 정착한 사람까지 나왔다.
지난해 목포 구도심 중앙동 ‘괜찮아 마을’에 한달 반 동안 머문 청년들. 60명 중 28명이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목포에 남아 취업을 했거나 창업 준비를 하고 있다. 박명호 공장공장 대표 제공
■ 도시재생 방안으로서의 ‘참여하는 관광’
이렇게 청년들이 지역 주민의 일상을 훼손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고 삶을 나누는 시도가 도시재생의 새로운 방안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주선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부연구위원은 “일시적인 청년 복지나 이벤트적 접근이 아니라 지역의 가치를 향상시킨다는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한데 머무는 관광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맹기돈 도시연대 마을 만들기 담당 활동가도 “활력을 잃은 마을에 머무는 관광으로 인구가 유입된다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고 도시 인프라가 늘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 생활을 원하는 청년과 지역을 연결하는 지방정부의 시도도 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파악한 각 지방정부의 청년마을 조성 검토 대상지는 경북 의성군을 비롯해 경남 김해시·남해시, 강원 영월군, 전남 곡성군, 전북 군산시 등 전국 6곳이다. 다만, 이런 도시재생 사업은 정부나 지방정부의 지원으로 이뤄지는데, 참여하는 청년들의 자발성을 끌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스스로 머물고 참여하지 않으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목포 구도심 중앙동 ‘괜찮아 마을’에 한달 반 동안 머문 청년들. 60명 중 28명이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목포에 남아 취업을 했거나 창업 준비를 하고 있다. 박명호 공장공장 대표 제공
윤 부연구위원은 “2017년 이후 도시재생사업 중 청년층 유입과 관련한 사업이 늘었지만 청년층이 사업 초기 단계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정부 지원이 끝나면 청년층 유입도 일회성에 그칠 우려가 크다”며 “사업 초기 단계부터 청년층의 참여를 보장하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은 “저성장 시대에 청년들이 원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가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에 청년들이 다양한 인생 경로를 개척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서 여러 시도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은 바람직하다. 청년들이 자신의 관심사와 가치를 다양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정부와 민간에서 판을 깔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끝>
전주/김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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