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번 프로젝트와 협업한 신현진 작가, 인도네시아 이주 가사노동자회에서 활동하는 나스리카, 영상 작업 등을 함께한 오퀴 라라. 박다해 기자
“다하죠, 뭐든 다.”
24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라사와 아사’ 속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가사노동자 나니 랏나 닝그럼(Nani Ratna Ningrum)은 가사노동자의 일을 이렇게 정의했다. ‘의식주’ 중에 이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다. “생필품은 사비로 사야해요.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싶어도 (커피값을) 봉급에서 차감하죠. 내 자식이 그리우면 고용주 자녀를 안아봐요. 고용주가 (그건) 허락해줬거든요. (고용주 가족이 아닌) 타인과 대화는 금지돼있어요.”
인도네시아어로 ‘맛, 느낌, 희망’을 뜻하는 ‘라사와 아사’는 2021년 말레이시아의 ‘인도네시아 이주 가사노동자회’(Pertimig)가 영상제작자 등의 도움을 받아 촬영한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이주 가사노동자의 경험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담았다.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상영회 겸 토론회에는 국내 결혼이주여성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서 온 이주가사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자신 또는 가족이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이들도 함께해 경험을 공유했다.
영화를 보면, 이주가사노동자가 돌봄과 가사를 떠안은 덕에 말레이시아 중산층은 경제활동을 지속해 나간다. 이날 행사를 꾸린 큐레이터 옹조린은 “말레이시아의 중산층 이상인 가정에서 가사노동자가 전적으로 양육한 이들이 현재 (부모와 자녀) 두 세대 정도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주 가사노동자에게 인권은 사치다. 다큐멘터리 속 빈티 로시다(Binti Rosidah)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지 못했던 때를 떠올렸다. “가장 슬픈 건 (팬데믹 때)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몇 달 뒤에나 받았단 거예요. 속이 미어지고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고용주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며 못마땅해했죠. 절 중개인에게 데려가 따지자 중개인은 제가 잘못했다며 제 뺨을 때렸어요.”
한국의 가사노동자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다. 이날 참석자들은 함께 주먹밥을 만들었는데, 이는 식사 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자들이 이동 중에 급하게 허기를 채워야 하는 현실을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국내 청소플랫폼 업체를 통해 일하는 몽골 출신의 한 결혼이주여성은 “고용주가 식사를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론 (주어진) 4시간 동안 청소를 다 마치기도 빠듯하다”라며 “주먹밥을 세 조각으로 나눠 싸갖고 다니면서 이동 중에 겨우 먹었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선 한국이 이주 가사노동자를 시범 도입하는 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고용노동부와 서울시는 지난 15일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서비스 제공기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낸 상태로, 이르면 올해 안에 이주 가사노동자 100명이 국내로 들어온다.
이주가사노동자인 나스리카가 이날 상영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주먹밥 만드는 일을 안내하고 있다. 주먹밥은 제대로 된 식사 공간과 휴식 시간을 제공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자들의 현실을 상징한다. 박다해 기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들에게 국내 가사노동자보다 저렴한 임금을 줘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왔다. 지난 8월 1일엔 자신의 페이스북에 “시범 사업 참여가 유력한 필리핀은 1인당 GDP가 3500달러로 우리의 10분의1 정도다. 이분들에게 월급 100만원은 (최저임금보다 적어도) 자국에서 받을 수 있는 임금의 몇 배 수준일 텐데 이를 두고 노예, 인권 침해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적었다.
이주 가사노동자들도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이주 가사노동자회’ 회원이자 1997년부터 말레이시아에서 일해 온 나스리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주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일하는 국가의 최저임금 이상을 주라고 국제노동기구가 이미 규정하고 있다. 그 이하로 주면 ‘현대판 노예제’로 불리는 강제노동(forced labor)이다. 가사노동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수록 가사노동자들은 더 착취당하기 쉬운 상황에 놓인다.”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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