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아침 광주 망월동 5·18구묘역에 있는 독일 기자 고 위르겐 힌츠 페터 기념정원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있는 시민군 강철수씨. 정대하 기자
“짧은 시간이지만 소중한 인연이었어요.”
18일 아침 광주 망월동 5·18구묘역에 있는 독일 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 기념정원 앞에 선 강철수(64·부산광역시 거주)씨는 <한겨레>와 만나 “1980년 5월23일 오후 군용 지프를 타고 시내 외곽을 돌며 부상자를 후송하고 치안 질서를 담당하는 업무를 맡았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2명과 한국인 1명이 손을 들고 차를 태워 달라고 했던 사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외국인 중 1명이 힌츠페터였고, 한국인은 고 김사복씨였다는 점은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고 김사복씨는 큰 반향을 일으켰던 5·18 영화 <택시 운전사>의 실존 인물이다. 강씨는 “그때 그들이 ‘광주 참상을 찍은 영상 필름을 외부로 보냈다’고 하면서 도청으로 데려달라고 했다. 도청 도착 시각이 오후 1시였다”고 말했다.
“힌츠페터 기자의 영면 소식을 듣고 당시 그를 안내한 기억이 떠올라 5·18기념재단에 연락했어요.”
강씨는 생전 ‘죽으면 광주에 묻어달라’는 뜻을 수차례 밝혔던 힌츠페터의 머리카락과 손톱 등 유품이 2016년 5·18 구묘역에 안장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2018년
5·18 구묘지에서 당시 한국을 찾은 힌츠페터의 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눈 적도 있다. 강씨는 “3년 전 병마가 닥쳐 호되게 앓고 4년만에 광주에 왔다”고 말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지프를 타고 시내를 돌고 있는 강철수씨(왼쪽). 강철수씨 제공
5·18민주화운동 때 시민군 차량을 타고 다니는 강철수씨를 북한 특수군으로 둔갑시민 극우 매체. 강철수씨 제공
빵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엔 고졸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던 강씨는 5월17일부터 대학생 시위대에 따라나섰다. 5월19일 공수부대원의 진압봉에 맞아 앞니 한 개가 깨진 그는 “군인들의 과잉진압에 분개해 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회고했다. 5월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후 시민 2명과 지프를 타고 간 광천동에서 카빈총으로 무장했다. 그는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주검들의 관을 열었는데 4구에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군인들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일부러 훼손한 것으로 같았다”고 말했다.
힌츠페터 기자(왼쪽)와 김사복씨. <한겨레> 자료 사진
시민군에 합류한 그의 모습은 누군가가 찍은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다. 강씨는 “지만원씨가 사진 속의 나를 빨간 원을 표시한 뒤 북한특수군이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5·18을 왜곡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씨는 그해 5월26일 오후 3시20분께 지인을 만나려 목포로 갔다. 그는 “동지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지금껏 5·18 보상 신청을 하지 않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에 거주하며 전도사로서 청소년 상담 활동과 함께 개인 사업도 했다.
이날 기념식장 밖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5·18기념사를 들었던 강씨는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아 아쉬웠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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