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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노동 등 인권침해 맞서 한·일 법정서 30년 ‘재판투쟁’

등록 2022-08-16 10:00수정 2022-08-19 02:38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씨 “사죄·배상” 요구
2018년 대법원 승소 …상표권 매각 현금화 눈앞
전시 미성년 여성 노동 수탈 상징적 사건 널리 알려
근로정신대 피해자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30년간 재판 투쟁을 해온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근로정신대 피해자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30년간 재판 투쟁을 해온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사죄를 받는 것이 소망이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볼라고 하요.”

일제강점기에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로, 30년째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재판 투쟁’을 하는 양금덕(93·광주시 서구 양동) 할머니는 15일 <한겨레>와 만나 “나 아직 건강해. 포기 안 해”라고 말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13~15살의 소녀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했던 근로정신대는 전시 미성년 여성 수탈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조선 소녀들은 일본 미쓰비시중공업(300여명), 후지코시강재공업(1089명), 도쿄 아사이토 누마즈 공장(300여명) 등에서 임금 한푼 못 받으며 강제노동을 했다. 해방 77년이 되도록 사과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양금덕 할머니 등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1944년 6월께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일곱째가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양금덕 할머니 등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1944년 6월께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일곱째가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 강제연행과 강제노동 1944년 5월 전남 나주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였다. 어느 날 일본인 교장과 헌병이 교실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일본에 가면 돈 많이 벌 수 있고, 중학교에도 진학시켜준다”고 꾀었다. 1학년 때부터 급장을 한번도 놓치지 않았던 양 할머니는 일본에서 공부해 교사가 되고 싶어 손을 들었다. 하지만 며칠 뒤 일본에 간다는 딸 얘기에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교장은 “지명받고도 가지 않으면 부모를 경찰서에 잡아 가두겠다”고 을렀다. 아버지 도장을 몰래 꺼내 담임에게 건넸다. 이때만 해도 양 할머니는 교사가 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일본에 건너간 양 할머니는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투입됐다. 시너와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고 비행기 동체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을 맡았다. 양 할머니의 말이다. “그때 코가 망가져 지금도 냄새를 잘 맡지 못혀요. 페인트가 눈으로 들어가 오른쪽 눈도 망가졌지 뭐야.” 10대 때 감당하기 힘든 산재를 겪은 셈이다. 공장에선 항상 배가 고팠다. 식사는 보리밥 약간에 단무지와 우메보시(소금에 절인 매실) 두알이 전부였단다.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94년 3월 이른바 관부재판에 참여한 양금덕 할머니(왼쪽에서 셋째)가 일본 야마구치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 앞에서 펼침막을 들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1994년 3월 이른바 관부재판에 참여한 양금덕 할머니(왼쪽에서 셋째)가 일본 야마구치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 앞에서 펼침막을 들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1944년 12월7일 오후. 양 할머니는 날짜와 시간을 명확히 떠올렸다. 그날 나주 학교 선배 최정례는 점심시간 종료 10분 전에 공장으로 가자고 했다. 양 할머니는 “좀 더 쉬겠다”고 했다. 최정례와 동창 김향남이 막 작업장으로 들어갔을 때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밖으로 급히 뛰쳐나갔던 양 할머니는 담벼락에 깔려 왼쪽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지진을 ‘도난카이 지진’이라 했다. 이 지진으로 최정례와 김향남 등 한국 소녀 6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양 할머니는 “허망했다.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 일본군 위안부로 낙인 1945년 초 나고야 공장이 연합군 공습으로 파괴되자 양 할머니와 함께 소녀들은 도야마현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의 다이몬 공장으로 일터가 바뀌었다. 여기선 한달에 한번 집으로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쌀밥 먹으며 중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고 썼다. 공장 관리인의 으름장도 있었지만 멀리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어 거짓 편지를 썼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단 한통도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해방 후 “조선에 돌아가 있으면 임금을 보내주겠다”란 회사 쪽 말을 듣고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양 할머니가 꿈에 그리던 나주역에 도착한 날짜는 1945년 10월22일이다. 일본으로 떠난 지 꼬박 1년 하고도 5개월이 흘렀다.

양금덕 할머니 등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1999년 3월1일 일본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행진하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양금덕 할머니 등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1999년 3월1일 일본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행진하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고향에 돌아온 뒤 더 큰 고통이 뒤따랐다고 한다. 사람들은 근로정신대 출신을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해 수군거렸다.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다. 이런 수군거림과 오해 탓에 한차례 혼담이 깨졌다. 언니 소개로 목수인 남편을 만나 1949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어느 날 남편이 “일본에서 남자를 몇명이나 상대했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일본 기업의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도 믿지 않아 싸움이 잦았다. 결국 남편은 집을 나가 따로 살림을 차렸다. 10여년 만에 남편이 남자아이 셋을 데리고 돌아와 화순에서 광주로 이사를 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돌아온 남편은 몇해 만에 세상을 떴다. 대인시장 노점에서 생선을 팔며 자녀 여섯을 홀로 키웠다.

1988년 12월 일본 나고야에 설립된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도식에 유족들이 참석해 오열하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1988년 12월 일본 나고야에 설립된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도식에 유족들이 참석해 오열하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 일본 법정 소송 첫발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일제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었다. 그때부터 양 할머니는 숨기기만 했던 근로정신대에 관해 입을 열기 시작했고 행동에 나섰다. 운동가로서 정체성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1992년 2월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회장 이금주)에 가입한 뒤, 그해 8월엔 ‘광주 천인소송’(원고 1273명)에 참여했다. 1994년 3월엔 일본 정부를 야마구치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피고로 제소한 ‘관부재판’(일본군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의 3차 원고로도 합류했다. 그러나 일본의 변호사들과 연대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번번이 패소했다.

2010년 3월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철수를 요구하며 눈보라 속에서도 의연하게 1인시위를 하는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2010년 3월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철수를 요구하며 눈보라 속에서도 의연하게 1인시위를 하는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양 할머니는 1999년 3월 일본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세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다카하시 마코토 등 일본 시민들이 꾸린 ‘나고야소송지원회’가 도움을 줬다. 하지만 1심(2005년), 2심(2007년)에 이어 2008년 11월 우리나라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의 상고 기각으로 패소가 확정됐다. 소송에선 졌지만, 성과는 작지 않았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상고 기각을 하면서도 피해자들의 강제연행, 강제노동, 임금 미지급 등의 사실관계는 모두 인정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이 2010년 11월부터 일본 지원단체 나고야소송지원회와 한국 지원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현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2년간 16차례에 걸쳐 협상에 나서게 하는 데 주춧돌이 된 재판소의 판결이었다. 다만 이 협상은 ‘사죄 표현’을 합의문에 넣을지를 놓고 조율하다 합의가 되지 않아 결국 2012년 7월 결렬됐다.

■ 한국 내 법정투쟁 양 할머니 등 5명(생존 2명)은 2012년 10월 광주지법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그해 5월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에서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이 근거가 됐다. 2013년 11월 광주지법 승소에 이어 2015년 6월 광주고법에서도 승소한 양 할머니는 2018년 11월29일 대법원에서 1억~1억5천만원씩을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양 할머니는 “내가 위안부가 아니라 근로정신대로 고생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게 가장 기쁘다. 지금까지 맞서 싸운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2013년 10월 광주지법 법정에서 양금덕 할머니(오른쪽에서 둘째)와 김성주(오른쪽에서 넷째) 할머니가 재판정에 앉아 있다. 시민모임 제공
2013년 10월 광주지법 법정에서 양금덕 할머니(오른쪽에서 둘째)와 김성주(오른쪽에서 넷째) 할머니가 재판정에 앉아 있다. 시민모임 제공
하지만 일본 정부와 기업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때 강제동원 문제가 해결됐다는 해묵은 주장만 되풀이하며 대법원의 배상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다. 이에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 대리인단은 2019년 3월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상표권 2건(양금덕)과 특허권 2건(김성주)을 압류했다. 미쓰비시중공업 자산을 매각해 배상금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서다. 2021년 9월 대법원에서 채권 관련 압류가 최종 확정되고 매각 명령을 받았다. 미쓰비시중공업은 또 불복했다. 한차례 항고가 기각되자 지난 4월19일(김성주)과 5월6일(양금덕)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대법원은 사건 기록 접수 후 4개월 안에 본안 심리를 진행할지 등을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금화가 임박한 셈이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지난 4일 광주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931원을 지급한 일본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지난 4일 광주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931원을 지급한 일본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외교부는 지난달 26일 담당 재판부에 사실상 판결을 보류해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양 할머니 등의 소송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의 처절한 저항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며 “한국 정부가 공익을 내세워 재판에 개입하는 것은 피해자들의 권리 실현을 방해하는 또 다른 국가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강제노무 동원 해결의 첫 출발점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인권침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양 할머니는 “하루빨리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나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다. 일본이 사죄해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1992년 8월부터 30년간 일본 정부와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통해 인권침해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1992년 8월부터 30년간 일본 정부와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통해 인권침해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양금덕 할머니. 시민모임 제공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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