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찍힌 기동타격대 모습. 훗날 구성회(왼쪽)씨, 임성택씨로 밝혀졌다. 5·18기념재단 제공
5·18 민주화운동이 어느덧 40돌을 맞고 있지만, 온전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한겨레>는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 삶이 헝클어진 이들의 이야기를 △이별 △고통 △망각 △참회 △부활 다섯가지 열쇳말로 나눠 들어봤다. 시민뿐 아니라 명령에 따라 광주에 투입됐던 ‘보통의 군인’들 역시 역사의 피해자였으며, 이들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 진행형이다. 5·18 40돌 다섯개의 이야기를 세차례에 나눠 싣는다.
5·18기동타격대동지회 회장인 양기남(59)씨는 가끔 휴대전화에 저장해놓은 옛 동료들의 사진을 보곤 한다. 1990년 어느 날 친한 동료 4명이 함께 제주도를 찾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동료들은 밝게 웃고 있지만 살아 있는 이는 양씨뿐이다.
“남아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남아무개는 술만 마시고 살다가 이제 정신을 차렸는데,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 다른 대원 대부분도 어렵게 살고 있어 걱정이다.”
1980년 5월26일 오후 2시 광주항쟁지도부는 옛 전남도청 2층 식산국장실에서 기동타격대를 조직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군사조직’을 만든 것이다. 대장은 윤석루(당시 19살), 부대장은 이재호(당시 33살)가 맡았다.
양기남 5·18기동타격대동지회 회장이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사진을 보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기동타격대 규모는 모두 60여명으로 1~6조는 4~6명씩, 예비로 꾸려진 7조는 30여명이 편성됐다. 지도부는 지원자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 출범식을 열어 가입선서문을 낭독하도록 했다. 기동타격대는 각 조당 지프 1대와 무전기 1대, 대원에게는 성능이 좋은 소총과 수류탄, 철모 등을 지급했다.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해 시내 진입을 저지하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다’ ‘싸움·음주 등 난동자들을 체포해 본부에 이송한다’ 등 당시 선서문을 살펴보면 기동타격대의 주요 임무는 계엄군의 동태 파악과 치안 유지였다. 시민들은 기동타격대가 지나가면 박수를 치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등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하지만 기동타격대원들의 삶은 대부분 순탄치 않았다. 5월27일 계엄군 진압작전 때 붙잡혀 구속된 기동타격대원 31명은 모두 상무대 영창에서 가혹행위와 고문 등에 시달려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 대원들은 1980년 10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후에도 신군부의 감시를 받았으며, 신원조회에 걸리는 바람에 일반적인 직장에는 취직할 수도 없어 사회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붙잡힌 시민군 기동타격대원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5·18기동타격대동지회 제공
그럼에도 기동타격대원들은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늘 앞장섰다. 활동비는 개인 돈으로 댔다. 보상금은 빚을 갚는 데 쓰거나 병원비로 들어가, 집안 살림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대원 가운데 절반은 이혼해 혼자 살고 있으며, 술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생계활동을 하지 못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된 대원도 1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우마에 따른 우울증, 불면증 등 정신적 질환을 겪고 사는 경우가 많다.
김씨 등 3명을 포함해 세상을 떠난 대원들도 5명이나 된다. 과거에 비해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기동타격대원들이 버티는 힘은 동료의식이다.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먼저 달려오고, 지난해 국회 앞 5·18 망언 규탄 농성에도 함께 참여했다. 묘비명마저 모두 똑같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5·18시민군 기동타격대 ○조원 여기 잠들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2008년 6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을 위해 옛 전남도청 철거 계획이 세워지자 5·18기동타격대동지회 회원이 반대 농성을 하고 있다. 5·18기동타격대동지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