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 가는 길엔 이팝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쌀밥처럼 흰 이팝나무 꽃들이 때론 눈물처럼 보입니다. 광주에서 취재하는 저에게 5·18 기삿거리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실 1997년 4월 12·12 및 5·18 대법원 판결 이후 5·18은 그리 큰 뉴스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해마다 5월18일 당일 화제성 상자 한두 꼭지를 보내면 됐습니다. 5·18 뉴스를 키운 사람이 바로 전두환씨입니다. 2016년 4월 자서전 발간을 앞두고 “나는 광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던 전씨 발언 이후 5월은 다시 주요 뉴스가 됐지요.
전씨 발언 이후 저는 5·18 관련 군 문서와 검찰 수사 기록(1995년)과 판결문(1997년) 등을 다시 찾아 ‘공부’했습니다. 12·12 반란 이후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저질렀던 학살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새해특집으로 ‘미래세대가 보는 광주와 5·18’이라는 기획을 준비하면서 청년들을 만나 조금 놀랐습니다. 5·18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 때문만이 아닙니다. 5·18을 마치 일상에서 즐기듯 경쾌하게 대하는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우선 무겁지 않았습니다. 한 20대 기획자는 5·18 캐릭터를 소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는 ‘오르골’(내장된 태엽이 튕기면서 나오는 소리)을 만들었더라고요. 5·18 할머니를 찾아가 애호박찌개 등 전라도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우며 5월 경험을 듣는 ‘오월식탁’ 영상을 제작하는 대학생들의 시선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때 저는 “아, 청년들에게 5·18을 가르치려고 들면 안 되겠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썼던 5·18 기사들이 그들에겐 ‘암호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18 40돌 특집을 준비하면서 한 대학생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서울 출신인 그는 “고교 수능에서 현대사 부분은 잘 출제되지 않아 5·18이 조선시대보다 더 낯설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고인이 되신 아버지가 한국전쟁 경험담을 이야기하실 때마다 먼 옛날 일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도, 솔직히 5·18에 대한 젊은 세대의 생각을 잘 몰랐어요. 그래서 ‘5·18 40돌 다섯개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이별-고통-망각-참회-부활이라는 열쇳말에 적합한 사람들을 통해 5·18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계엄군의 총을 맞고 남편이 떠난 뒤 자신도 모르게 두 아들이 프랑스로 입양돼버린 이귀임(67)씨의 사연(
5월12일치 1면 ‘이별’ 편)을 취재하면서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난했던 탓에 학교에 가지 못한 그는 한글을 잘 쓸 줄 몰랐는데도 다른 사람 필체의 입양동의서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 사연을 담은 기사를 쓰면서 그 대목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글을 몰랐다는 부끄러움까지 표현하기가 미안했습니다. 5·18 때 정신질환자 아들을 둔 노모(
3회 ‘망각’ 편)에겐 사진 취재를 부탁했다가 거절하자 받아들였습니다. 그 기사엔 ‘백지 사진’을 써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담자는 메모를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참회’ 편(
5월13일치 9면 기사)에선 5·18 가해자 편에 섰던 보통의 군인들을 역사의 피해자로 봐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5·18 당시 학살을 지시했던 명령권자나 고위간부가 아니라면 광주에 왔던 수많은 보통의 군인들도 “역사의 피해자”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5·18 때 광주에 온 뒤 마음 졸이며 살고 있는 대다수 보통의 군인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에 공감하는 것은 5·18 진상규명에도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물론 5·18 성폭행이나 개인적 일탈에 따른 극악한 범죄는 예외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40돌을 맞는 광주의 5·18 풍경도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전야제도 취소됐고, 각종 전시나 공연도 온라인으로 중계하네요. 5·18을 기억하기 위해 준비한 많은 행사를 축소하게 돼 아쉽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광주’에도 성찰할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광주가 실개천처럼 낮게 흘러 사회적 약자와 연대할 때 ‘저항·희생·연대’라는 5·18의 의미가 ‘부활’하리라고 믿습니다.
광주/정대하 전국부 선임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