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5·18 민중항쟁 제40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박광남씨가 멀리서 아버지의 묘역을 바라보고 있다. 김용희 기자
17일 오전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중항쟁 제40주년 추모제. 박광남(43)씨가 영정 속 아버지의 젊은 얼굴을 보다가 울컥했다. 아버지(박건용·사망 당시 42살)는 1980년 5월24일 송암동 포도밭에서 일을 하다가 계엄군 간 오인사격 때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았다. 당시 서로를 시민군으로 오인한 11공수특전여단과 전투교육사령부 보병학교 교도대의 사격전으로 주민 4명이 숨지고 여럿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총탄에 머리를 다쳐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88년 작고한 박건용씨의 묘.
뇌를 다친 아버지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 가정을 등한시하며 가족들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1980년 8월 신군부가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만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박씨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88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어렸을 적 아버지를 원망했다”면서도 “(이제는) 나보다 더 젊은 아버지 영정사진을 보니 마음이 아리다”고 말했다.
계엄군의 총탄에 아들을 보낸 박순금씨가 17일 오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중항쟁 제40주년 추모식에 참석했다. 정대하 기자
5·18유족회가 광주민주화운동 이듬해인 1981년 5월 옛 망월동 5·18묘지에서 열기 시작한 추모제는 5·18 행사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날 열린 39번째 추모제엔 소복을 입은 어머니 60여명 등 유족과 5·18 유공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코로나19로 자리는 띄엄띄엄 배치됐고, 참석자들은 모두 마스크를 써야 했다.
5·18 민중항쟁 제40주년 추모제가 17일 광주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리고 있다. 정대하 기자
계엄군의 총탄에 아들을 보낸 박순금(81)씨는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라고 적힌 종이모자를 쓴 채 추모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의 묘비 뒷면엔 ‘민주화를 위해 쓰러져간 내 아들아 자랑스럽기만 하다’고 적혀 있었다. 추모제가 끝난 뒤, 김주숙(65·부산시)씨는 동생인 김의기 열사 묘지 위에 최근 출간된 <김의기 평전>을 올려놓은 채 한참을 통곡했다. 김 열사는 1980년 5월3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5·18 진상규명을 외치고 유인물(‘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며 투신했다. 김씨는 “40주년인 올해는 작고하신 어머니(권채봉씨)가 더욱 생각난다. 동생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작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김의기 열사의 누나 김주숙씨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국립5·18민주묘지 동생 묘에서 오열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5·18 전야제는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됐다. 5·18 전야제는 1988년 정부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면서 광주구동체육관에서 시작돼 이듬해부터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로 옮겨져 해마다 개최해왔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날 마스크를 쓰고 금남로를 걷고 5·18민주광장에 설치된 전시물 등을 관람했다. 5·18기념재단이 마련한 ‘사이버 참배’ 공간엔 “오월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추모의 글 수백건이 올라왔다.
김용희 안관옥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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