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춤을 글로 배웠다. 시인 김영태가 쓴 무용에 대한 글과 스케치를 통해서 처음 무용을 읽었다. 그는 시인선 표지에 들어간 시인들의 얼굴을 126컷이나 그렸다. 어떤 시인은 얼굴은 모르는데 그 그림은 기억이 난다. 나는 그의 펜 선에 실린 무용수의 움직임이 좋았다. 시인 마종기는 김영태를 “눈 감고 걸어간 몽상의 나그네”이고 “문학이고 시고 무용이고 그림이고 음악이고 연극 안에서 푸푸 허우적대다가 익사한 어부”라고 했는데 그가 쓴 무용에 대한 단상들을 읽으면 물속에서 참다가 숨이 터질 때 느끼는 짜릿함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무용 공연에 가선 무용수들의 움직임보다 음악이나 이야기를 따라갔다.
생각해보니, 실제로 무용을 보고 마음이 크게 움직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몇년 전에 미국 포틀랜드에서 열린 현대예술축제에서 무용 공연에 파묻혀 일주일을 보냈다. 느지막이 일어나 예술가들의 대화를 듣고 공연을 두개 보고, 무대를 내려온 그들과 다시 맥주를 마시며 밤새 떠들었다. 그때, 현대예술의 선두에 서서, 그 전선을 앞으로 힘겹게 밀고 가는 무용가들의 몸짓에 비로소 전율을 느꼈다. 비로소 손끝에서 발끝까지 이어진 선과 그 위의 팽팽한 기운이 눈에 들어왔다. 선이 그린 공간이 차오르고 움직이니 숨이 막혔다. 아, 그래서, 이런 감동을 받는다면 이들의 움직임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한평생을 보내다 갈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아직까지 직접 몸을 움직여 춤을 추어 볼 엄두를 내보진 못했다. 일흔 노인이 발레를 배우는 이야기라는 풍문을 듣고 <나빌레라>의 책장을 넘겼다. 웹툰으로 시작해서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었고 책으로도 나왔으니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심덕출씨는 어린 시절, 장사하러 간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창문 너머로 보았던 발레 수업. ‘백조의 호수’ 발레의 초연이 이루어진 곳, 볼쇼이 극장으로 유명한 그곳에서 발레를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평생 발레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살림에 가족들을 건사하느라 틈이 없었다. 시간을 빼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하는 것은 언감생심. 그는 아무에게도 그 꿈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훌륭하게 키운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금슬 좋은 부인도 그 꿈을 몰랐다.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는 좋은 사진기 하나만 덜렁 남기고 떠났다. 그가 사진기를 왜 가지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덕출씨는 결심했다. 후회만 남기지 않기 위해서, 편견과 반대를 무릅쓰고 발레를 시작했다.
춤에 끌려 책을 잡았는데, 이 만화는 발레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늙어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일찍 마음을 먹고 꼭 해라. 늦었어도, 그때가 빠른 것이니 시작해라. 그렇지만 인생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덕출씨에게 찾아온 치매. 젊어서는 먹고사느라 엄두도 못 낸 일을 겨우 시작했는데, 몸은 낡아간다. 아직은 고칠 방도가 없는 이 병을 이길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서 버텨보지만 버티고 버텨도 기억은 지워지고 아무도 모르는 공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 하지만 덕출씨의 숙인 고개를 잡아당기는 무게를 가늠해본다. “나도 당신의 무용 같은/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의 동작이/ 깊이 가슴에 남아/ 그 무게로 고개를 숙여 버리던”(마종기 ‘무용’ 부분)
만화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