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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단 한 사람의 힘

등록 2021-08-20 04:59수정 2021-08-20 10:20

[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이민경 외 9명 지음 l 동녘(2017)

내 비밀물건 1호는 중학생 때 쓴 일기장이다 . 먼지 쌓인 낡은 일기장에는 욕이 가득하다 .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꾹꾹 눌러쓴 글자를 보고 있으면 누가 볼까 봐 얼굴이 화끈거린다 . 당시 내 화는 부모님 , 선생님 , 학교 , 세상을 향했다 . 무언가에 엄청 화나 있는데 ,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 ‘세상이 싫다 . 다 죽어버려 . 내가 죽는 게 나을까 . 그럼 당신들은 후회할까 .’ 어쩌다가 일기장을 펼치면 한때 나였던 내가 낯설고 부끄러워서 얼른 덮어버렸다 . 이사할 때마다 버리려고 시도했지만 , 왠지 중요한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 이해하려 하지 않은 열다섯 살 내 분노는 책장 구석 ,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잊혔다 .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를 읽는 동안 , 일기장 안에 담긴 분노를 떠올렸다 . 성적이 유일한 관심사여야 하는 학생의 자리가 맞지 않고 ,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고 , 사회성 좋은 친구 역할을 못 해내고 , 고분고분한 딸이지 못했던 그때 . 모든 게 어긋나는데 이유를 몰라 답답함이 압력밥솥처럼 한껏 차올랐다 . 이대로 두면 터질 것 같아 밤마다 일기장에 욕을 쓰며 그 시기를 버텼다 .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욕하고 욕하며 욕을 썼다 . 누구도 지금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고 , 부모님과 선생님이 유일한 어른의 모습이었던 그때 다른 삶의 가능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 ‘가만히 있으라 ’는 선생님의 말과 냉각된 교실 분위기에 몸과 마음을 비틀 때 , 그 많은 사람 중 내 뒤틀린 마음을 이해하거나 설명해줄 사람이 없었다 .

만약 내가 그때 단 한 사람 , 다른 이야기를 건네는 한 사람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 “이성애자가 아니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수 있음을 , 자살하지 않고 살면 내게도 밝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 나와 같은 사람이 있고 나와 같은 사람과 연대하는 사람도 있고 , 그게 선생이나 부모나 친구일 수도 있다는 것을 ”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 그랬다면 내 분노는 일기장에 머물지 않고 ,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을 거다 .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 , 다른 질문을 던졌을지 모른다 . 페미니즘은 상식에 도전하며 , 서로를 돌보기 위한 새로운 상식을 살아내기 위한 가치라는 걸 책은 말하고 있다 . ‘네 잘못이 아니야 . 그곳에 적응해야만 살아지는 게 아니야 . 충분히 다르게 살아도 돼 .’

몇 년 전 , 대안학교에 강연을 다녀온 밤 , 한 학생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 “제가 대안학교에 온 이유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였어요 . 선생님은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 자유로운 사람 . 그 시절 내게 꼭 필요했던 존재가 된 느낌에 설레서 잠을 설쳤다 . “생각해보면 지금껏 내 인생에는 페미니스트 선생이 한 명도 없었다 . 씁쓸하다 . 조금 더 일찍 페미니스트 선생을 , 페미니즘을 만났더라면 나는 더 서둘러 나와 너에 관해 묻고 쓰는 이가 되었을 테다 .”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 . 자책하다가 아프지 않도록 , 투명한 분노가 맑은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 . 반듯하게 각진 학교에 자기 몸을 맞추느라 아파하는 누군가에게 ,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단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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