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의 삶, 사랑의 말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양효실 지음 l 현실문화(2017)
아무는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뚝뚝 눈물을 흘렸어요. “언니, 저 마음이 아파요.” 어느새 눈물, 콧물로 젖은 휴지가 언덕만큼 쌓였어요. “제가 휴지를 너무 많이 썼죠.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은 아무의 단골 대사. 저는 이제 휴지로도 미안하냐며 웃었어요. 휴지 언덕이 산이 될 때쯤, 아무가 말했죠. “언니, 저 이제 힘들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됐어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서 힘들 수 있어요. 이런 제가 좋아요.”
아무와 저는 많은 부분이 닮았어요. 어쩌다 장녀로 길러져 어릴 때부터 의젓한 역할을 맡았고, 타인의 눈치를 재빨리 살피게 되었고, 내 기분을 무시하는 법을 배웠어요. 미소 잃지 않기. 조금 위험한 닮은 점도 말해볼까요? 우리는 가정 폭력을 당했고, 친밀하고 낯선 이에게 강간당했고, 임신 중지 수술을 받았고, 홀로 사후 피임약을 먹었어요. 나를 상처 준 가족을 책임지느라 아픔을 외면했어요. 돌보는 자리에서 자부심을 느끼다가, 문득 그들을 증오하고 시기하고 연민하고,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계속 죽였죠.
아무는 슬플 때 웃어요. 상대를 걱정하며 괜찮다고 안심시키느라 분주해요. 함께 글을 쓸 때, 아무는 피해 경험을 쓰다가도 독자를 걱정하듯 빠르게 마무리했어요. ‘그래도 전 괜찮답니다?’ 덕분에 독자는 표정을 잃어버렸죠. 정말 괜찮은가, 화자가 괜찮다는데 내가 감히 울어선 안 되지. 그게 아무가 버티는 전략이었다는 걸 그때는 아무도 몰랐죠.
지난봄, 아무는 드디어 다른 문장을 썼어요. ‘내 슬픔의 얼굴은 웃음이었구나. 웃길 때 웃고, 울 땐 울고, 화날 땐 화내고, 슬플 땐 슬퍼하는 사람. 감정과 표정의 시차가 같은 사람. 이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 글을 쓴 뒤 아무는 뒤늦게 아프기 시작해요. 벌어진 시차를 좁히는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죠. 제가 아무에게 “네가 제일 불쌍해” 말한 날, 아무는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었다며 울다 웃었죠. 말해줘서 고맙다고요. 스스로 허락하지 못한 말을 듣게 된 거예요. 아이러니하고 이상한 대화에서 위로받는 우리는 외계인, 괴물이 맞아요.
저는요, 아무처럼 뒤늦게 우는 사람들을 만나요. 그때 아팠다고, 여전히 아프다고,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아무개들. 당신이 있어 제가 울 수 있고, 제가 있어 당신도 울 수 있다며 휴지로 콧물을 막고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서로 고맙다 해요. 뒤늦게 울게 된 이들은 지금 울지 못하는 얼굴들을 외면할 수 없어요. 그래서 같이 울기로 하죠. “내 비밀이 우리의 비밀이고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삶임을 공유하고자 했다”는 양효실의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을 연말에 우리가 함께 읽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날에 울고 있을 얼굴을 떠올려요. “나는 탄생의 축복이란 문장만큼이나 탄생의 비참이란 묘사가 일반화되길 바라고 있다.” 어떤 표정도 허락되는 연말이길 바라요. 망가진 삶을 정직하게 아파하는 일이 사랑의 가능성을 빚어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어요. “우리는 부정적인 것의 고귀함을 통해, 또 부정적인 것에 고귀함을 부여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뒤늦게 울고 있는 아무가 제게 알려준 새로운 탄생 이야기예요.
홍승은 집필노동자